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 ONE Feb 27. 2023

불행해지는 엘리트와 몰락하는 중산층 사회에 관하여

[밑줄독서] 대니얼 마코비츠 - <엘리트 세습>

부유한 부모를 둔 어린이들은
자그마치 일생의 1/3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교육 때문에 혜택을 얻고 고통을 받는다.    

불행해지는 엘리트와 몰락하는 중산층

이제는 챗 GPT라는 것이 나와서 더더욱 필자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 쳇. 그래도 필자는 운이 좋다. 최소한 현재 직장은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도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두가 불행한 능력주의 사회의 진실과 함정 그리고 비애에 관하여 쓴다. 표면적으로는 사회 시스템이 더욱 공정을 지향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우리 삶은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워 보이는지 요원한 것인지.  


몇 년 전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논란을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의 불공정하고 정의롭지 않은 정책은 '유능하지만 무기력한 취준생'을 양산했다. 개인의 능력과 그 능력을 공정히 평가받은 면접/채용 과정 자체를 무시한 채 결과적 평등만을 추구한 운동권 정치인들의 한계다. 그들은 중산층도 아니고 그렇다고 엘리트도 아닌 시대를 잘 타고난 말 그대로 '운동권' (운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각자 진영 논리에 따른 공정과 정의로 양극화된 사회에서 가장 비극은 같은 서민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갈라 치기 하는 것이다. 정규직 vs 비정규직, 월급 200/300/400만 원 누군가는 대기업을 다닌다고 실수령 5-600만 원 받는다고 댓글 대결하는 장면에서는 비극의 악취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능력주의의 필수적인 논리는
혜택을 집중하고 차별을 개인의 기량과
노력이 부족하고 기준에
미달한다는 말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모욕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능력주의 함정 : 자신의 밥을 벌어먹기 위해 자신의 심신을 착취하는 메커니즘

현대사회의 핵심 시스템인 성과주의와 능력주의. 자신의 능력과 그에 따른 성과를 보여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마주한 현실은 만성적 피로와 불안으로 가득한 상태다.


필자가 대학생 시절 <한병철 - 피로사회>를 읽고 단순히 '인사이트'가 상당한 책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피로사회의 굴레 속에서 어쩌면 나 자신이 벗어날 수 없을지라도 모른다는 불안과 더불어 누군가의 동경이 대상이 되는 엘리트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자신을 착취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기력해진다.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친구. 퇴사하고 와튼스쿨 MBA를 간 동료. 회사 전체 1등 영업실적 달성한 후배의 삶을 보면 현대사회에서 능력이란 가히 착즙(Squeezing)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식 교육 : 엘리트 세습을 위한 인적 자본 생산 공장이 되어버린 지나친 '교육'지책 

교육은 상속세가 들지 않는다. 증여세도 없다. 굳이 있다면 교육 비용일 것이다. 그렇기에 자식 교육이야말로 가장 경제적인 세습 전략일 수도 있다. 필자가 마침  책을 읽은  글감을 정리하다가 주재원으로 근무  귀임하신 임원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임원) 주재를 하면 우리 애들은 특례를 준비해야 해요. 요즘은 중국 동남아 주재원도 많아서 여름 방학이 되면 우리 애들은 대치동에 월세 얻고 학원을 보냈습니다. AP나 SAT 특강 들으면 2달 동안 1500만 원 정도는 들었지요.

(필자) 상무님, 아무리 주재원 급여가 한국보다 높다고 해도 부담스럽지 않으셨습니까?

(임원) 당연히 부담스럽죠. 애들이 어렸을 때는 현지 언어도 배워야 하니 프리스쿨 보내고, 어학원 보내고 영어 공부도 따로 시키고 한국 돌아가서도 적응해야 되니 역사 과목도 따로 챙겨줘야 하고. 한국에서만 받을 수 있는 교육은 ZOOM으로 비대면 학습 시키고 그랬지요.

옆자리에 있던 팀장님도 본인 주재원 시절을 말씀하시며 자식이 2명이면 여름방학 동안 1천만 원 이상은 기본으로 깨진다며 동조하셨다. (그러면서 처갓집이 여유가 있으면 좋다고 하셨다. 버는 돈으로 자식들 교육비 충당도 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보인 쓴웃음은 그 이후에 이어진 회식 자리의 술보다 더 쓰게 느껴졌다.)


슬프게도 중산층의 몰락과 계급 양극화 현상이 심화될수록 우리의 인지부조화 수준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돈을 퍼부어도 대기업 들어가도 결국 월급쟁이 되는 것이다. 엘리트 전문직이 된다고 해도 작가의 말처럼 "한때 사회 전반에 공평하게 분배되었던 교육과 직업이 현재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 숫자가 너무 적은 엘리트 계층에 집중되어 있다. 중산층에 타격을 입힌 바로 그 힘이 엘리트 계층에게도 과중한 부담으로 작용" 할 것이며 "부유한 부모를 둔 어린이들은 자그마치 일생의 3분에 1에 해당하는 기간에 교육 프로그램 때문에 혜택을 얻고 고통" 받을 것이다.


이런 모순에 스스로 잠식되고 싶지 않은 분들에게 강력하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명쾌한 해결책은 없으나 사회 현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관점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책 내용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조승연 작가의 유튜브 영상을 먼저 시청하는 것도 추천드린다 - https://youtu.be/8Vy2tGaw0Eo)



항상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다. 밑줄은 세상과의 만남이다. 밑줄을 긋는 행위는 본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에 대한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한번 밑줄을 보며, 그때의 생각과 느낌을 반추하는 행위의 반복은 곧 자신만의 '의식'이 된다. 이러한 연유로 밑줄 긋기는 나만의 독서 의식이 되었고, 밑줄은 세상과 나를 잇는 선으로써 'MEETJUL'이 되었다.

한때 사회 전반에 공평하게 분배되었던 교육과 직업이 현재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 숫자가 너무 적은 엘리트 계층에 집중되어 있다.   
 부유한 부모를 둔 어린이들은 자그마치 일생의 3분에 1에 해당하는 기간에 교육 프로그램 때문에 혜택을 얻고 고통을 받는다.    
엘리트 밀레니얼 세대는 특권을 얻기 위해 일생 동안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꺾이지 않는다. (중략) 늘 긴장하고 지친 상태다.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들조차 능력주의가 진정한 성공을 촉진하지 못하고, 부유하지만 불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리라 생각한다.    
능력주의의 마력은 그 해악을 은폐하고 그에 따라 능력주의로 인한 좌절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사람들은 통념보다 더 선량하지만, 주위 상황은 통념보다 훨씬 더 악의적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소득과 근면성은 서로 반대되는 경로를 걸었다. (중략) 역사적으로 엘리트 계층들은 근면성을 경멸했다. 이제 상류사회에서는 근면성이 높은 평가를 받는 반면에 한가한 삶은 경멸을 받는다.
능력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중산층이 된다는 것은 시대에 뒤처질 뿐 아니라 퇴행하는 것이며, 성장보다는 유지에 전력하고 뒤떨어지는 생활방식에 빠지는 것이다.    
능력주의가 의미 있는 직업과 기회의 확산을 활성화한다는 통념은 가짜다. 능력주의는 중산층에게서 사회적/경제적 기회를 앗아간다.    
노력이라는 유행병은 능력주의 엘리트들을 파괴한다. 엘리트의 삶은 사실상 요람에서 무덤까지 상위 직업을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다.    
능력주의 때문에 생겨난 엘리트들의 멋지다는 직업이 요구하는 근무시간과 자기 도구화가 만연해 떠아는 부담으로 인한 불만을 가린다.    
평범한 학사 학위만 있으면 엘리트 직업이 보장된다는 믿음은 시대에 뒤떨어진, 이전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오늘날의 은행은 대출 결정이 얼마큼 정확했는지가 아니라 대출 건수를 기준으로 대출 담당자의 실적을 평가함으로써 평범한 근로자가 전문적인 기량과 판단력을 발휘하거나 조립 공정과 다른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한다는 가식도 떨지 않는다. (중략) 대출 담당자는 친절하기만 하면 된다.
 기술 혁신은 중간 숙련 근로자에게서 관리 기능을 앗아간다.    

기술 혁신 및 기업 규모의 축소로 인한 인원 감축은 수익성이 낮은 기업은 물론 좋은 기업에도 닥치며, 경기불황뿐 아니라 호황 때도 계속된다.     
 수많은 근로자가 고역에서 해방되었지만 동일한 메커니즘에 의해 생산에서도 배제되었다. "강요된 게으름". + 할 일도 여가도 빼앗긴 사람들
신기술은 노동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켜 생산을 엘리트 계층에 집중하는 동시에 노동과 여가를 융합하고 있다.    
능력주의의 필수적인 논리는 혜택을 집중하고 차별을 개인의 기량과 노력이 부족하고 기준에 미달한다는 말로 정당화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모욕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생산성을 직접 측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눈에 보이는 탈진이 생산성의 지표가 된다.    
능력으로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 경제 구조는 소외된 자기 착취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부유층은 과로를 숭고한, 심지어 남자다운 행위로 칭송하고 게으름을 경멸한다. 반대로 나머지 사람들은 일에 대한 지나친 헌신을 자기애의 일종으로 폄하한다. 능력주의로 인한 경제적 분열이 도덕적 갈등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능력주의의 등장으로 엘리트 가정은 자녀를 엘리트 근로자로 만드는 데 필요한 인적 자본의 생산 현장으로 재구성되었다.    
중산층 가정의 일하는 여성은 남성의 임금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즉, 아내가 남편보다 많이 벌 때는 결혼이 유지될 가능성이 떨어진다.    
부유층은 나머지 계층에 비해 운동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이와 같이 신체 단련은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사람을 결정짓는 것은 몸이며 삶의 방식은 그 삶을 사는 사람의 몸 곳곳에 영향을 준다. 오늘날 부자의 몸은 나머지 사람과 다르다.
(사실과 다를지라도) 그럼에도 거짓 선지자는 지지 기반을 얻는다. 불만이 뿌리 깊은 사람은 대부분 도움을 받지 못하더라도 자기 불만을 들어주는 것을 가장 중시하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을 길들이는 법 (Taming The Timing)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