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은 사람 같았어요. 아, 내가 더 이상 학교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구나.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을 한 후 그렇게 저는 덴마크로 떠났습니다."
덴마크로 파견 오기 전, 한국에서 덴마크 교육제도 관련 강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공립학교 영어 교사였던 강연자는왜 덴마크를 갔냐는 질문에 위와 같이 대답했다.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 같았다고. 왜? 40명 중 30명 이상이 잠을 자는 교실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학생들과 교사들은 무기력증을 먹고 좀비가 되어버렸다. 개별적 무기력함이 서로를 희생양으로 삼는 그 교실은 살아있음으로써 죽은 공간이었다.
교사의 책임인지, 학생의 잘못인지는 중요치 않다. 근본적으로 제도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입시라는 병원에 입실했던 환자들은 변화를 얘기한다. 교육개혁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당장이 급한 응급 환자들은 변화의 메스가 나에게 오지 않길 바란다. 변화를 얘기하지만 변함은 없다. 그렇게 호소는 냉소로 변했다. 그러나 냉소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덴마크에서 수업을 들으며, 그들의 교육제도를 조사하면서 '덴마크의 교육은 한국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덴마크와 한국의 교육 현실은 완전히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을 뒤집어 봤다. 곧 육교가 되었다. 한국과 덴마크를 잇는 다리에는 반전이 필요했다.
1. 여백에 사유를 바르고 인생을 그리다_애프터스콜레와 폴케호이스콜레
누군가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학창 시절이 언제였냐고 물어본다면 주저 없이 '재수생'시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학창'은 학교의 창문을 의미하지만 도서관 창문을 보며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했던 시공간이 내겐 진정한 학교였다.
우리가 행복을 자주 느끼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불안이 일상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는 알랭 드 보통의 문장은 옳다. '이번에도 실수하면 어떡하지'와 같은 불안이 독학재수 기간 내내 나를 괴롭힌 것처럼.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나는 될 놈이라며 주문을 외우곤 했다. 하지만 주문은 질문을 낳았다. "어떻게 잘될 건데?". 당시에 그 답을 찾진 못했다. 그럼에도 그때는 사유의 방향이 오로지 그리고 오롯이 나를 향해 있었던 순간이었다.
덴마크에는 애프터스콜레와 폴케호이스콜레라는 학교가 있다. 한국의 대안학교와 비슷한 것으로 전자는 고등학교 진학 전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고 후자는 18~24세 학생 또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다. 공통적인 특징은 학생들이 제도권 교육과정에서 '쉼표'를 찍을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애프터스콜레의 경우, 중점 분야에 따라 다양한 커리큘럼을 제공한다. 또한 기숙생활을 통해 학생과 교사의 관계, 학생과 학생의 관계가 친밀해져 새로운 학습 동기부여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애프터스콜레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의 중퇴율이 더 낮은 것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근거다.
폴케호이스콜레는 영어로 Folk High School로 번역하며, 비공식 성인교육 또는 민중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이다. *모든 학생과 교사들이 교육 기간 함께 살고, 먹고, 일상을 공유하면서 그들은 자연스레 일종의 작은 규모의 ‘사회 (microcosmic)’를 형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법으로 “전인교육 (general broadening education)”을 제공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며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존의 학교들과 경쟁하는 것은 금지되어있다. 이 학교들은 성적 혹은 점수를 매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며 특정한 직업교육을 제공해서도 안 된다. 주된 과제는 학생들의 삶을 위해 교육하는 것이다. 즉, 개인 그리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오늘날 덴마크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한다.(* 인용)
2. 비움은 곧 채움이다_Bridge the gap with a gap year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으며,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과도 친해질 수 있는 학교. 읽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폴케호이스콜레의 경우 현재 한국에서는 자유학교라는 이름으로 시도되고 있다. 기숙학교 형태는 아니지만, 시민들의 평생 교육을 위한 인생학교시민학교 등의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애프터스콜레와 상응하는 한국의 교육제도는 자유학기제와 자유학년제라고 할 수 있다. 덴마크처럼 아예 성격이 다른 학교는 아니지만, 성적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나가는 시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은 비슷하다. 다만 부작용도 존재한다. 초기 적응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 이외에 가장 큰 역효과는 자유학기제 특강이다. 필자가 대치동에서 알바를 했던 학원에서도 자유학기제를 맞이한 학생들을 위한 여러 특강 수업이 있었다. 또 다른 문제는 중2, 중3부터는 다시 시험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통계청의 2016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학교·급별로 초등학교 24만 1천 원, 중학교 27만 5천 원, 고등학교 26만 2천 원으로 나타났다. 왜 중학생의 사교육비 지출이 가장 높을까? 그 이유는 특목고 입시 준비 때문이다.
다양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자유학기제는 결코 입시 위주의 교육 틀을 깨기 힘들어 보인다. 한국에서 입시 위주의 교육은 대학 서열화와 취업 시장에서의 등급화가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갭이어(Gap year)가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갭이어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 학생들이 받는 스트레스 경감에 그 목적이 있다.
‘갭이어’란 학업을 병행하거나 잠시 중단하고 봉사, 여행, 진로 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의 다양한 활동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통해 향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을 말한다. 필자도한국식 갭이어를 가졌었다. 10개월 동안 혼자 도서관을 다녔던 독학재수 기간이 그것이다. 입시로 인한 여러 스트레스 중에 필자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대학 입시에 실패해서 재수를 하면 인생 실패자, 패배자가 된다는 생각이었다. 학교 정문에 걸려있는 대학 입시 현수막에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때면, 졸업식을 앞두고 하는 얘기의 주제가 미래의 대학생활과 암울할 재수생활로 나뉠 때면, 졸업식에 참석한 가족들 표정이 환한 미소와 환해 보이려는 미소로 갈릴 때면, 대입의 실패가 곧 인생 실패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인생의 전부가 입시였기 때문이다.
독학재수를 하며 유일하게 입을 열었을 때는 지하 매점에서 식권을 구매할 때였다. 그 이외의 모든 시간 동안 나는 나와 끊임없이 대화했다. 가끔 친구들의 소식이 들려올 때면 스스로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자책했다. 매번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입시 생활이 버겁게 느껴질 때면 하루 종일 공원을 걷거나, 탈진할 때까지 운동을 하거나, 인강을 틀어만 놓고 잠을 청했던 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찾을 수 있었다. 공부하기 싫을 때, 진정한 공부 목적을 생각해봤다. 하기 싫은 일을 지금 몰아서 하고 있는 거라고 자기 최면을 하며, 미래에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나갔다. 때로는 과거에 잘못했던 일들을 반성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답 사회에서 이탈한 낙오자에서 인생의 답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여행자가 되었다. 나를 감싸 오던 문제는 곧 변화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3. 문제는 곧 기회다_PBL:Ploblem Based Learning
데이터 마이너 송길영 박사의 현장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문제가 있는 곳이 곧 기회다." 그렇다. 문제가 곧 기회다. 누군가에겐 문제가 곧 결과이고, 바뀌지 않는 정태적 개념이다. 하지만 변하려는 사람에겐 문제가 변화의 시작점이고, 기회의 요람이다. 발명이 불편함에서 탄생하고 글쓰기도 결핍에서 비롯되듯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덴마크의 행복 교육을 얘기할 때, 시험이 거의 없는 약한 경쟁을 그 이유로 제시한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가장 큰 비결은 교육이 우리 인생과 갖는 '실재성(reality)'에 있다. 즉, 덴마크 교육은 상당히 실용적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교육법이 바로 PBL(Problem based learning)이다. 문제 해결 중심의 학습법. 난민 문제를 예를 들어 보겠다.
난민 문제를 보통 한국에서 다룬다면 난민 수용의 찬반 여부가 주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설득적인 논거를 준비해, 어느 입장이 더 나은지를 판단하는 식으로 토론이 이뤄질 것이다. 또는 난민 이슈를 갖고 수업을 한다면, 보통 교사들은 난민이 무엇이고, 쉥겐 조약에 대해 설명하고, 이 문제가 갖는 의미에 대해 첨언하는 식으로 강의를 할 것이다. 하지만 덴마크는 다르다. 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유럽 국가임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수업은 굉장히 실제적이다. 덴마크에 유입된, 유입되고 있는, 유입될 난민의 수를 제시한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따라 난민 정착을 어떻게 도울지, 유입 시 피난처(shelter)는 어디에 마련할지 등을 고민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쉥겐 조약'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어떻게? 구글에 검색해서 말이다. 이제 교사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시대는 지났다. 교사는 학생들이 현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케이스와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관리자(Organizer)와 학생들이 문제에 봉착했을 때, 조언자 역할을 동시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만약 이런 학습법을 현재 자유학기제 프로그램에 적용한다면, 나는 다음의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싶다. 중학생 친구들은 연예인 문화, 팬덤에 상당히 영향을 많이 받는다. 단순히 좋아하고 응원하는 것을 넘어, K-Pop 열풍이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고민하도록 기회를 준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외국인들을 위한 홍보 영상을 만들어보는 프로젝트를 실시하여,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어 공부도 하고, 영상 편집 기술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과도한 팬덤이 문제라면, 팬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콜라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기획사에 보내본다든지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토론식 교육을 얘기하지만,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말하다가 적당히 절충해버리는 형식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리 교육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각자의 인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문제는 우리가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하나의 '기회'다. 위기가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라는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우리 인생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평소에 잘 느끼지 못했던 행복의 순간들을, 불행이 직간접적으로 닥쳐올 때, 그 소중함과 의미를 깨닫는 것처럼 보인다. 배움을 위한 공간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모르겠다가도, 휴식의 기간을 가질 때, 배우고 깨닫는 게 많아 보인다. 정말 모순이지 않은가?
아니, 모순이 아니다. 우리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는 것을 '성숙'해진다고 표현한다. 그건 '숙성'과정과 비슷하기 때문이라 믿는다. 불행에서 행복을 찾고, 행복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이유는 이전까지 행복했던 순간이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우리 교육에 '쉼표'가 필요한 이유는 이전까지 배워왔던 지식들을 자신의 경험으로 나아가 개개인의 인생 '지혜'로 숙성시키기 위함이다.
이번 글에서는 교육을 뒤집어 '육교'를 만들자고 했다. 이때의 육교는 새로운 제도 정착을 위한 가교 즉, 브릿지(Bridge)를 의미한다. '갭이어'는 10년 넘게 이어진 경쟁에 지친 학생들을 위한 시간이 될 수 있다. 혹자는 이렇게 비판할 수도 있겠다. "경쟁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반문하겠다. "과연 경쟁이 없어질 수 있을까?, 오히려 경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차근차근 줄여나가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이는 대학에 입학하면, 수업도 적게 듣고, 술 마시고 흥청망청 놀 수 있으니까 굳이 갭이어는 필요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이렇게 묻고 싶다. "대학이 스트레스에 대한 대가와 보상으로 여겨지는 지금의 상태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갭이어와 PBL이 결코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다만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단계별 접근법이 필요하다. 갭이어는 오랫동안 쌓여왔던 일생의 스트레스를 일상의 타임라인에 덜어내는 쉼표다. PBL 은 교육의 전부가 입시가 아님을 학생들에게 깨닫게 함으로써, 스스로 교육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따옴표'다. 그럼으로써 덴마크와 한국 교육의 행복 차이를 조금씩 줄여나갈 수 있으리라 감히 확신한다.
+ 글을 쓰고 있다가 가수 샤이니 종현의 죽음을 접했다. 유일하게 좋아했던 남자 아이돌의 멤버였던 그의 유언을 보며 더더욱 우리 삶에 '쉼표'가 필요함을 뼈저리게 느낀다. "지겨운 통증들을 환희로 바꾸는 법은 배운 적도 없었다. 통증은 통증일 뿐이다. (의사는) 그러지 말라고 날 다그쳤다. 왜요? 난 왜 마음대로 끝도 못 맺게 해요?"라는 그의 마지막 외침 속에도 쉼표는 없었다. 죽음으로써 살고자 했던 그의 행동만큼은 우리 각자의 삶에 '쉼표'가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원하는 곳에서 살아 숨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