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혼남]라디오 들으며 점심 혼자 먹는 남자

마음의 점을 찍는 1시간, 점심 혼자 먹는 남자 (8)

by AND ONE
혼자 조용히 차분하게
점심 먹기 좋은 떨림
93.1 MHZ
KBS Classic FM

혼자 조용히 차분하게 점심 먹기 좋은 떨림. 93.1 MHZ, KBS Classic FM의 주파수는 요즘 나의 삶과 연동되는 중.


점심에만 보이는 미세한 떨림들. 벚꽃 잎이 공중제비를 돌던 봄날의 떨림은 이제 곧 초록 여름의 울림으로 변하겠지. 살랑이던 나뭇잎은 습윤한 공기를 머금고 흐느적 거린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반사되는 유리 벽면과 자동차 본네트의 떨림. 혼자 먹는 점심은 언제나 감상적으로 변한다.


누가 감시라도 하는 것일까. 감상에 빠지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아뿔싸! 무음으로 변경했어야 했거늘. 사실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 점심을 먹게 된 이유는 이놈의 핸드폰 진동 때문이었다. 시차와 국경을 쉽사리 넘나드는 보이스톡의 존재. 아예 핸드폰을 보고 싶지 않아서 시작한 라디오 듣기.


혼자 조용히 차분하게 점심 먹기 좋은 떨림. 오후 일과도 힘차게 시작하기 위해 좋은 소리를 몸에 채우는 화성(harmony)의 시간. 음악 속에서 화음이 연속함으로써 생기는 음향의 시간적 흐름. 주파수와의 공명. 마음의 이정표를 점으로 남기는 시간. 전파 사이로 누군가의 따뜻함과 아직 세상은 살만하지 아니한가.


소중한 점심시간에 클래식 라디오 듣기. 현실의 수많은 진동과 떨림을 소음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화음으로 들을 것인지의 문제- 라고 쓰다가 문득 깨닫는다. 나란 놈, 이번에도 참으로 팔자 좋은 소리 하는구나. (방금까지 그 팔자 좋은 놈은 사연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팔자 좋은 고민한다~"라고 생각했다) 여하튼 팔자 좋은 놈들이 불만도 많다.


원래 점심 혼자 먹는 남자는, 팔자 좋지 않은 놈들의 전유물이었다. 배달 시간 엄수와 필달이 필요한 기사들은 휴게소에서 간단히 먹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빵을 뜯으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요즘은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화물기사 전용 내비게이션으로 쓰거나 업무 전화로 인해 화면이 끊기는 걸 생각하면, 나랑 주파수가 맞는 라디오 채널 하나 찾는 게 여전히 가장 든든한 밥친구가 된다.


트럭커에게는 아무래도 클래식보다는 시사 라디오가 제격이다. 이 땅에 살고 있으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의 문제에 비판의 목소리 하나 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남자를 슬프게 만드는 법. 우리는 이 사회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는 믿음으로 땀내와 짠내 뒤섞인 밥을 목구멍으로 넘길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라디오가 아니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혼밥 하는 남자여, 다음 점심에는 꼭 라디오를 들어보시길. 타인의 사연을 듣고 혼자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차에서 소리도 질러보고 노래도 불러보고 때로는 눈을 꼭 감으며 빵 한 조각 베어 물어보시길.


혼자 먹는 점심에는 라디오가 반찬으로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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