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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한 덩이

엄마와 외할머니

by 인지니

우리 엄마에게는 오빠 한 명, 언니 한 명에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이 둘이 있다. 엄마 위로 언니 한 명인가가 더 있었는데, 어려서 죽었다는 얘길 얼핏 들었으니 우리 엄만 딱 가운데 낀 자식이었다. 그랬기에 엄마는 부유한 집에 살면서도 많은 걸 양보하고 살았으리라. 거기에 옛날 어른들이 다 그렇듯 외할아버지께서 장남만을 유독 챙기고 나머지 자식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외할머니께서는 깨이신 분이셨는지 엄마의 재능을 알아보고 다락방에 장구며, 소고며, 한복들을 숨겨놓고 엄마에게 무용을 가르치고 각종 대회에 내보내면서 엄마의 재능을 아낌없이 밀어주었다고 한다.


엄마의 재능과 외할머니의 아낌없는 지원에 결국 엄마는 경희대 무용과에 합격했고, 입학 통지서를 가지고 집에 갔다. 몰래 학교를 보내려던 외할머니가 입학금을 구하는 것을 수상이 여긴 외할아버지는 집 안을 발칵 뒤집어서 엄마의 장구와 무용 소품들을 다 찾아내셨다. 결국, 장구는 찢기고 한복과 소품들은 모두 불살라졌다. 외할아버지께서 당시 엄마에게 하신 말씀은 무당 짓거리하는 너한테 쓸 돈은 없다. 그리니 곱게 있다가 맞선 봐서 직업 좋은 놈한테 시집이나 가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출 금지에 머리까지 박박 밀어버렸다. 엄마는 한동안 속상하고 힘겹게 두문불출했으리라. 아마도 살고 싶지도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도 비슷한 경험으로 엄마를 아주 많이 원망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엄마에겐 이종사촌이자 절친한 친구인 순이 언니라고 있다. 엄마의 사촌 언니의 딸이니까 엄마에겐 조카뻘이고 내게는 팔촌이 되는 분이라 나는 어려서부터 다른 엄마의 친구분들은 모두 아줌마라 불러도 순이 언니만은 언니라고 불렀다. 어려서 내가 생각하길 만약 우리 엄마가 없으면 순이 언니가 우리 엄마가 되는 것일까? 상상할 정도로 우리를 자주 찾아와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우리 남매와도 잘 놀아주던 순이 언니!

언니와 엄마는 어려서 한동네에서 살았기에 엄마는 늘 언니 집에서 잘 놀았다. 그때 사실 엄마는 제(祭)보다 제 밥에 관심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순이 언니 집에는 순이 언니의 친오빠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가 하숙하고 있었는데, 그 하숙생 오빠는 충청도 시골서 상경한 촌놈이었다. 하지만, 그 시골 촌놈은 작은 체구에 많이 말랐지만, 날렵한 콧날에 촌놈 같지 않게 훤칠하니 잘 생겼었다고 했다. 게다가 기타 치는 솜씨와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기에 중학생이었던 엄마는 하숙생 오빠에게 홀딱 빠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게 순이 언니 집을 놀러 다니며 충청도 하숙생 오빠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던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머리를 밀려 집에 갇혔다가 탈출해서 무작정 하숙생 오빠가 일하는 곳으로 갔다. 그렇게 엄마와 아빠는 그날, 나를 계획에도 없이 가졌다. 그리고 엄마는 집을 나가서 아빠가 급하게 얻은 월세방 한 칸에서 아빠의 군대 간 남동생의 아내와 두 살짜리 아들 그리고 홀어머니까지 모셔다가 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막내 이모 손을 잡고 엄마가 사는 집으로 여러 번 엄마를 데리러 갔다고 했다. 그때마다 외할머니는 나를 지우고 무용도 다시 하라면서 엄마를 여러 번 회유하셨는데, 엄마는 그냥 아빠 집 귀신이 되겠다며, 나를 꼭 낳겠다고 우겼단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 수 있다. (^^;)


엄마는 친할머니와 작은엄마 시집살이를 엄청나게 했던 것 같다. 엄마가 손윗사람인데도 작은엄마 아기의 똥 기저귀도 엄마가 다 빨아주고, 밥도 집안일도 모두 엄마가 다 했다고 한다. 친할머니도 울 엄마 집에서 당신 아들 싫어한다며 울 엄마를 꽤 구박하셨던 것 같다. 나는 감히 상상도 안 간다. 부잣집 딸로 곱게 자라서 무용만 하던 엄마가 뜨거운 물 한 바가지 나오지 않는 남의 집 쪽방에서 점점 불러오는 배를 잡고 쪼그리고 앉아 손빨래며 설거지며 온 집안일을 다 했다니······.

‘풍로’라고 예전엔 석유를 넣어 성냥으로 불을 붙여서 사용하는 취사도구가 있었는데, 그런 걸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엄마가 그 풍로 하나로 다섯 식구의 식사를 끼니때마다 해가며 시집살이했다니, 내 딸이면 난 둘러업고 집으로 왔을 것 같다. 하지만, 울 엄마 고집과 자존심을 생각하면 외할머니나 울 엄마나 두 분 다 고집이 장난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도 외할머니는 엄마를 보러 갔고, 갈 때마다 쌀이고, 생선이고 먹을 것을 막내 이모에게 들려서 전해주셨다. 엄마는 임신 중이었고, 먹고 싶은 게 많았을 텐데, 늘 친정 어린 동생을 통해 외할머니가 전달해 주는 음식을 시댁 식구들에게 해 먹이셨겠지! 외할머니는 그런 딸이 얼마나 속상하고 가슴 아팠을까? 그래서 딸을 일찍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신 건 아닌가 잠깐 생각해 보기도 한다.

아무튼, 늘 멀리서 바라만 볼 뿐 직접 엄마 앞에 나서지 않으시던 외할머니께서 또 다른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많이 안 좋아지셨고, 마지막으로 딸에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는데, 울 엄마가 얼큰한 돼지고기찌개가 먹고 싶다고 했단다. 절대 그런 얘길 하는 사람이 아닌데, 정말 먹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외할머니도 그걸 아셨기에 아픈 몸에도 직접 정육점에서 돼지고기를 한 덩어리 끊어 마루에 슬쩍 고기를 놓고는 가슴을 치고 울며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엄마는 그 고기가 외할머니가 주신 고기란 걸 알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옆집에서 고추장 한 국자 얻어다가 파 마늘에 친정엄마가 주신 돼지고기만 넣고 고추장찌개를 끓였다. 하지만, 그 찌개는 다른 식구들 입에 다 들어가고 엄마는 멀건 국물에 까슬까슬한 누룽지를 말아먹었다. 엄마는 그 기름 낀 국물에 누룽지를 말며 친정엄마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리웠을 것이다. 임신부가 먹고 싶었던 음식을 자기들끼리만 배 두드리며 먹었을 시댁 식구들이 서운했을 것이고, 그런 집에 엄마만 가정부처럼 넣어두고 집에 잘 안 들어오는 아빠가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엄마에게 나는 유일한 위안이고 기댈 곳이었으리라. 나는 기억나진 않지만, 당시 엄마 뱃속에서 그 엄마의 설움과 배고픔과 속상함을 다 함께 느끼고 있었으리라. 뱃속에서 엄마를 토닥토닥하고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다음 해 외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엄마는 그 뒤로 오랫동안 돼지고기 고추장찌개를 끓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돼지고기 고추장찌개는 내가 고등학교시절 엄마가 투병하실 때였다. 집안에 온통 매콤한 냄새가 나면 호박과 대파, 느타리버섯에 두부와 돼지고기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인 고추장찌개는 정말 다른 반찬이 필요 없었다. 흰쌀밥에 벌겋게 한 숟가락씩 떠 올려 먹으면 정말 맛있고 행복했는데······.

나의 전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엄마가 해 주시던 고추장찌개라는 말에 내가 가면 매번 고추장찌개를 한 솥 끓여두고 먹으라고 하셨다. 어머님의 그 마음이 고마웠는데, 이젠 그 시어머님께서도 이미 하늘의 별이 되신 지 오래라서 그조차도 못 얻어먹는다. 그래도 나 역시 최애 찌개라서 할 게 없으면 일 순위로 매번 끓이게 되는 게 고추장 돼지고기찌개다.

울 아들이 끓여놓은 찌개를 열어보며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또야?”

“그래서 왜? 안 먹어?”

“아니, 고추장찌개, 맛있지!”


하면서 또 한 대접 떠서 밥이랑 뚝딱 먹는 아들을 보면 또 내 기분도 뿌듯해진다.

고추장찌개는 엄마의 눈물이, 속상함이, 젊음이 가득 담긴 찌개다. 난 그런 찌개가 있었다는 걸 고등학교 때나 알았을 정도로 엄마는 그 찌개를 한 번도 안 끓였다. 얼마나 아팠으면 그랬을까? 단지, 찌개일 뿐인데.


오늘 우리 엄마의 이야기는 어쩌면 예전 거의 모든 어르신의 이야기일 것이고,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집안 셋째이고, 둘째 딸이었던 엄마 또는 우리 엄마들의 흔하디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당시 어느 집에나 있던 귀남이와 후남이의 이야기(1992년 MBC 64부작 드라마,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은 집안의 이란성쌍둥이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울 엄마의 삶이 내게는 너무나 안쓰럽고 가슴 아프다.

일요일 저녁, 오늘 저녁엔 그 오래전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그 당시 먹고 싶었고,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그리고, 그 뱃속의 나에게 전해준 큰 돼지고기 한 덩이의 사연과 사랑이 그대로 담긴 고추장찌개나 끓여 먹어야겠다. 오늘은 특별히 엄마와 외할머니 몫까지 듬뿍 담아 더 맛나게 끓여봐야지!^^




작가의 말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당시 아홉 살이던 막내 이모에게 들었던 얘기와 엄마가 친구들과 하던 얘기, 순이 언니에게 간간히 들었던 얘기들로 모아 모아 내가 만들어 본 우리 엄마의 스무 살 이야기였다. 엄마의 러브(?) 스토리와 삶에 관한 이야기는 엄마와의 약속도 있기에 나중에 더 깊고 자세하게 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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