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2018>
“여기, 이 사진 속 여자 보신 적 없어요? 얼굴은 뾰족하고 눈은 엄청 크고...”
“글쎄요 하도 손님이 많으니 기억할 수가 있어야지, 원”
한 손에 사진을 들고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해미가 사라졌다. 해미 집 주변을 백방으로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 느끼하게 생긴 놈이 어떻게 한 게 분명하다.
백미러로 찬찬히 그의 동태를 살핀다. 내가 그를 쫓았다는 걸 의식이라도 했는지 내 차를 힐끔 보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젠장, 들켰나. 지금 들킨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해미를 찾아야 한다.
띵동-. 벨소리를 누르자 그놈이 문을 연다.
“종수 씨, 어쩐 일이에요?”
“아, 근처에 볼 일 있어서 왔다가 잠깐 들렀는데. 저 여기 좀 있다가 가도 되죠?”
벤인지 뭔지 놈의 집에서 해미의 흔적을 뭐라도 찾기 위해 뜬금없지만 그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집 거실 구석 한편에 해미가 평소 즐겨 썼던 모자가 보인다.
“이거 해미 거 아니에요? 해미 왔다 갔어요?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던데.”
벤에게 묻자 그는 무척 당황하며 얼른 모자를 집어 들고는 다른 한쪽으로 치운다.
“아, 아뇨. 이거 예전에 해미가 저한테 가지라고 줬던 건데. 저도 해미 못 본 지 꽤 됐어요. 연락도 안 되고….”
아무래도 수상하다. 화장실 수납장에선 해미의 손목시계가 발견됐다. 이 집 곳곳에 해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온다, 쌔-한 느낌이 온다.
트럭을 몰고 집으로 향하는 길,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프리카에서 해미가 저 놈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좀 더 용기를 내 해미에게 고백했더라면 지금 해미는 내 옆에 있었을까? 노을이 유난히 노랗게 지던 날, 벤과 함께 우리 집으로 온 해미는 내게 말했다.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어. 그런데 죽는 건 너무 무섭지. 그냥...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벤은 내게 말했다.
“저는 2주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지저분해서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들, 걔네들 다 내가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 그리고 난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면서 느끼는 거죠.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
사이코패스 같은 벤이라는 놈,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더니 해미를 죽인 게 분명하다. 덜덜덜 떨리는 내 손이 겨우 핸들을 붙잡고 있다. 해미는 쳇바퀴 굴러 가는듯한 내 삶에 활력소가 되어준 여자였다. 그런 해미를 감히 너 같은 새끼가. 복수하겠어.
다음 날, 나는 벤을 미행한다. 그리고 기회를 노린다. 한적한 도로를 달리던 벤의 차가 갓길에 멈췄다. 그리고 나도 그 뒤에 멈춰 선다. 차에서 내려 안주머니의 칼을 매만지며 그의 차로 다가선다.
똑똑-. 운전자 창문을 두드리는 순간부터 난 오늘 기필코 그를 죽이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스르르 내려가는 창문으로 놈의 얼굴이 보인다.
“잠깐 나와 봐요.”
“종수씨, 어떻게 우리가 여기서 만나요?”
“개소리 집어치우고.”
“종수야….”
나지막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순간 귀를 의심한다. 해미 목소리다. 조수석에 있던 해미가 얼굴을 내민다.
“아니, 너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일단 장소 옮겨서 얘기하자. 우리 차 뒤따라서 와.”
안도함과 동시에 벙찐 나는 그들을 따라 어느 허름한 주택 골목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해미는 머쓱한 듯 건물 2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를 쳐다본다. ‘노을처럼’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웬 아주머니들이 우리를 반긴다.
“선생님 오셨어요?”
벤은 사무실처럼 보이는 조그만 방으로 인도했고, 해미는 아주머니들과 함께 이상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종수씨, 많이 놀랐죠. 해미가 모른 척 해 달래서... 이렇게 된 이상 다 얘기해 줄게요. 혹시 해미가 왜 아프리카에 갔었는지 기억나요? 그레이트 헝거. 해미는 거기서 그들을 만났어요. 그리고 삶의 목표를 찾았대요. 조용히 사라지고 싶지만 죽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그레이트 헝거의 삶을 전하고 싶다나. 저렇게요.”
벤의 시선이 멈춘 곳엔 두 팔을 벌리고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는 해미가 보였다. 옆의 사람들도 해미를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황홀했다.
“아니, 그런데 그동안 왜 숨은 거래요?”
“그건, 해미가 여기 연습실을 마련하느라 돈을 빌렸는데 그 돈을 못 갚아서 쫓기고 있거든요. 채권자들한테 쫓겨 다니느라 모든 흔적을 지운 거죠.”
그의 말을 들으니 모든 상황이 이해됐지만, 내가 아닌 벤에게 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는 사실에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벤은 내게 더 가까이 와서 내 귓속에 대고 속삭였다.
“그리고 사실, 비밀이 하나 더 있는데. 해미랑 나랑은 서로를 지켜주는 사이예요. 나는 해미를 숨겨주고, 해미는 내 취미활동을 돕죠.”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흘렀다.
해미와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적한 밭에 세워져 있는 비닐하우스였다. 해미가 미리 알아본 곳이라 했다. 주인의 손길이 잘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비닐하우스.
“종수씨, 잘 봐요.”
타닥-. 성냥을 긁어 불꽃을 만들고 비닐하우스 안으로 던지자, 이미 부어져 있던 기름과 만난 불꽃이 이내 큰 불길을 만들었다.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를 느끼는지 벤의 표정은 황홀했다. 그때, 망을 보던 해미가 소리쳤다.
“튀어! 주인 온다!”
깜짝 놀란 나는 해미의 외침에 차에 얼른 올라탔다. 벤과 해미도 황급히 차에 탄다.
“아 씨, 좋았는데.”
“그니까, 그래도 내가 망 톡톡히 보고 있지?”
비닐하우스를 삼킨 불길이 산처럼 솟는다. 내가 너무 영화를 많이 봐서 꼬인 건가, 어리둥절한 나는 멀어지는 비닐하우스를 바라보며 다시 깊은 생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