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어떻게 하는 거죠

금사빠

by 냉장고

단어부터 저렴한 느낌이 나는 금사빠. 금방 사랑에 빠지고, 또 금방 사랑에서 빠져나온다.


이 글은 금사빠 탈출 의지를 표명하는 글로 맺게 될 것이다. (결연)






나의 연애사를 돌아보면 이렇다 할 만한 절절하고 아름다웠던 만남은 없었다. 나는 꽤나 감수성이 높은 사람인데도 연애는 늘 플라스틱같이 딱딱하고 뻔했으며, 진실된 사랑이라는 건 책과 영화, 상상에서나 대리 만족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젠 나의 연애가 늘 진부했던 원인이 관계 맺음에 대한 내 미성숙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좋아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기도 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둘의 마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한 적은 거의 없었다. 절절하게 짝사랑했던 사람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아무 매력도 없는 사람이 되기 일쑤였고 그냥 이렇게 저렇게 아는 사람으로 남은 관계가 많다.


나는 내향적이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남녀가 같이 있는 자리에서 짝이 없는 사람들은 서로를 의식하기 마련이다. 상대가 어느 정도의 매력이 있다면. 여기까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문제는 다음부터인데, 나 같은 경우 첫인상의 어떤 포인트에서 설렘을 느끼면 그 호기심을 호감으로 인식하고 당장 부스터를 달고 좋아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기형 작물처럼 자연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마음을 거대하게 키워놓고 빨리 상대방에게 피드백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다가 어찌저찌 사귀게 된 경우도 있지만 연애에 돌입하고 초반의 설레임이 지난 뒤 점차 실망스러운 모습들이 보이면 관계는 금방 시들해진다. 물론 사귄 것보다 가벼운 만남 혹은 짝사랑으로 끝난 경우가 열 배 정도 많다. 오래된 친구들에게 얘기한 남자만 해도 몇 명인지. 친구들은 내게 금사빠라는 직함을 하사했고 언젠가부터 내 새로운 에피소드에도 시큰둥했다. 어차피 머잖아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것임을 알기에. 늘 누군가를 좋아해야 하는 사람처럼 이어달리기 바통 넘기듯 좋아하는 대상이 바뀌었고 어떤 때는 두 명 이상의 사람을 좋아하면서 누구랑 사귀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심각했고 애절했다. 웃기게도 10대 시절의 얘기가 아니다.


내가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단면을 부풀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장 최근에 했던 연애가 끝나고 한동안 그와의 관계를 곱씹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그 연애가 나의 연애사에서 물리적 시간으로 가장 긴 것이었는데 꽤나 깊은 정이 남았음을 헤어지고 나서 새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연애를 즐겼던 건지 한 사람을 사랑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사랑의 감정을 느낀 '순간'들은 있었는데, 어쩌면 더 오래 만났다면 이 순간들이 자주 생겨서 점이 선이 될 수 있었을까. 만남이 길어지고 편해지면서, 각자의 찐생활에서 묻어나는 날 것의 모습들을 확인하면서 둘 사이를 통과하는 공기가 달라진 건 사실이었다.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 나도.

헤어지기 며칠 전 날 사랑한 적이 있었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가 했던 말이다.

비슷한 우리가 만났던 걸까.




얼마 전 친구를 보러 여행 간 곳에서 친구 남자 친구의 소개로 서울에서 놀러 온 다른 일행과 다 같이 논적이 있다. 우리는 늘 술을 마신 상태였기에 즐거웠다. 그중에 음악 하는 B라는 사람이 있었다. 만나기 전부터 B가 참 괜찮은 친구라고 거듭 얘기를 들어서인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는데 내가 생각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만 말투나 동작에서 여유가 있고 쾌활하며 올곧은 면도 있어 보였다.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쓰레기를 주머니에 넣어 가져 가는 바른 습관을 지녔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이건 내 기준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들이라 호감이 생겼다. 더군다나 그가 내게 남자 친구가 있는지, 마지막 연애가 언제 끝났는지, 전에 만난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은지 등의 질문을 했기에 내심 내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구나 생각했고 이때쯤 슬그머니 상상의 밸브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틀어막았지만 몰랑몰랑한 가스는 이미 새어나가 달달한 환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틀 정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설렜는데 그 이후 아무 일도 없었고 서울에 올라와 각자의 일상으로 복귀한 지금, 그냥 여행지에서의 기억이 되었을 뿐이다. 김도 샜지만 그보다 서른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런 일들에 잠시나마 설레발쳤던 내 마음이 너무 방정맞아서 민망할 따름이다.


밀려왔다 쓸려가는 바닷물같은 마음 ⓒ냉장고



주로 내가 좋아한 상대는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이었다. 늘 생각만 하고 실행력이 없는 나는 진취적인 리더형의 사람에게 특히 끌렸고 이미 사회 경험이 많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좋아했었다. 무언가를 이룬 이미지에 홀려 동경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시작한 관계는 일방이든 쌍방이든 동등할 수 없는 관계였다.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몇 점으로 평가될지 전전긍긍하며 일희일비하고 안달복달하였다. 상대가 나보다 낫다는 전제 아래 상대방에게 괜찮은 애인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커서 저자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상대에게 나를 투영해 초점은 결국 나에게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함께한다는 생각이 부재했기에 마음을 키우는 것도 혼자의 일이었고 덜어내는 것도 혼자였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걸 인정하니 마음이 편하다. 허상에 기댄 가벼운 마음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면 애먼 바람만 일으킨다. 마음이 바닥에 차분히 내려앉도록 가만히 있는 게 좋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마음의 초점이 한곳에 집중되지 않고 흐리다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 누가 관심을 보여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평소처럼 지내다 보면 나를 알아주고 내가 더 알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보다 선명해질 테고 행동은 그때 가서 해도 전혀 늦지 않겠지.


금사빠는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면 날림공사라고 할 수 있다. 대충 지어놓아서 살다 보면 하자가 계속 발생한다. 하지만 어디가 고장 난 건지 알기도 어렵고 별다른 애착도 없으니 그냥 다른 집으로 이사 가버리는 것이다. 텅 빈 집에 애꿎은 가재도구들만 덩그러니 남기고.


이제는 생각한다. 깊은 관계를 맺는 중에 서로의 성격과 가치관이 충돌하여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내하고 양보하고 같이 풀어가려는 의지가 생길 만큼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지 물어보자고. 그리고 예스라는 답이 나오면 그때부터 좋아하겠다고. 어떤 이를 진짜로 알아가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 진짜를 만나기 위해 마음을 잠시 닫아두어야겠다.


어찌 보면 사랑은 정량적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다. 만남의 횟수, 함께 보낸 장소들의 수, 시시콜콜한 대화의 양, 서로의 눈을 바라본 시간은 사랑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을까. 어떤 것을 정말 사랑하려면 물리적인 시간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내가 고양이를 사랑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나와 이 친구는 같이 지낸 지 만 4년이 되어가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어제보다 오늘 더 고양이를 사랑한다. 늘 사랑스럽고, 실수해도 전혀 화나지 않고, 자연히 보살피게 되는, 그리고 터놓고 마음을 주게 되는 그런. 내가 경험한 사랑 중에 가장 진실된 것인데 사람도 이렇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