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가을로 충만한 충렬사 세병관 뜰에는 백일장에 나온 아이들로 가득하다.
모두가 뭔가를 써내느라 골몰하고 있을 때 구경이나 나온 듯 멀뚱히 눈동자만 굴리고 앉아있는 열 살 아이.
지나가던 중학생 언니가 말을 건다.
"니는 안 쓰고 뭐 하노?"
"뭘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제목이 뭔데?"
"단풍요"
"니는 단풍 하면 뭐 생각나노?"
"음... 아기 손바닥이 다닥다닥 붙어 서로 인사하는 거 같아요"
"그리 써라"
열 살 아이는 '그리 써서' 제법 큰 상을 받았고, 그 이후로는 그리 쓰든 저리 쓰든 짜내 쓰든 어떻게든 써야 했다. 그것도 잘.
한 번의 과대평가가 메어준 짐이었고, 알면서도 내려놓기 싫은 짐이었다.
어린이 도서관을 하면서 아이들을 상 방석에 앉혀주는 용한 글짓기 샘 노릇을 할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어쩌면 글을 쓰는 것보다 첨삭하는데 더 재능이 있는 것도 같았다.
고이는 법이 없으니 무에 쓸 것이나 있을까? 박박 긁어 쓰던, 수 없는 신앙 간증글마저 은혜로운 가운을 벗고 나서는 단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못 써도, 안 써도,
쓰고 싶다는 욕구는 멈춘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럴수록 더 커져갔다. 바람을 잡으려는 갈피 없는 손짓 마냥 마구 허우댔다.
그때,
내게 온 것이 사진이었다.
'그리 쓰고' 싶고
'글이 쓰고' 싶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사진이란 것이 참 묘해서 말하지 않아도 길게 쓰지 않아도 通 했다.
점점
'그리 쓰는' 대신 '그리 찍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사진을 찍다 보면 왜 찍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에게 사진은 식욕보다 반응이 빠른 본능에 가깝다. 눈에 들어온 순간 바로 찰칵!
눈을 깜박이듯 누른다.
이유를 생각하거나 의미를 생각하지도, 필요를 생각하지는 더더욱 않는다.
발견이었다.
사물과 풍경 안에서 겹쳐지는,
그 안에 존재하는 ‘나’라는 존재의 발견.
찍어서 행복한지 결과물과 박수가 행복한지에 대한 질문도 자주 받는다. 물론 둘 다이지만 나는 찍는 순간의 행복이 몇 배는 더 크다. 찍을 때 미칠 듯이 좋았으면 옮기지 않고 그대로 삭제해버리거나 오래 묻어놓기도 한다. 꿈에서 깨기 싫은 아이처럼.
그럼,
써서 행복할까 읽혀서 행복할까?
역시 전자를 택하고 싶다. 내가 바로 나의 독자다. 단 한 명의 독자만 있다 한들 어떨까!
사진이 발견이듯,
글쓰기 또한 발견이다.
발견에서 시작되는 창작이다.
지나칠 것들에 대한 발견,
지워질 것들에 대한 발견,
깨닫지 못한 것들에 대한 발견,
느끼지 못한 것들에 대한 발견.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예측된 발견이다.
발견하면 찍게 되고 쓰게 된다
툭!
.
터트려 감춰진 것이 드러날 때 애써 다시 덮을 이유가 있을까? 내 안에서 찰칵 찰칵 터지는 텍스트들이 툭 툭 튀어나오면 그저 즐거이 나열하고 배열하면 될 일!
한동안 사진에 숨어 글자로 춤추는 것이 어색했지만,이제 사진 위에서 글로 춤추고 싶다. 나의 춤이다.
자유롭게.
나는
그리 보고, 그리 찍고, 또 그리 쓸 것이다.
꿈을 꿨다.
꿈에서 글을 썼다. 신이 났다.
하지만 꿈에는 메모지가 없더라.
기억하지 못해도 행복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 행복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