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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읽는 엄마 May 18. 2022

천천히 피는 꽃이 향기롭다

늦된 아이 믿고 기다려주기

둘째 아이가 여섯 살 되던 해 유치원 신학기 상담 날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아이의 자존감, 사회성, 기본 생활 습관에 대해 칭찬을 해주셨다. 우리 아이가 잘 성장했다는 생각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도 아주 잠시, 선생님께서는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잘하는 아이가 발음이 좀 더 정확하다면 친구들과 지낼 때도 더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을까요?   지금은 아이들이 어리니 발음으로 놀리지 않지만, 학교에 다니면 아이가 상처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학교 입학하기 전에 언어치료를 받아보는 게 어떨까요?”


둘째 아이는 어린이집을 다니던 4세 때도 말이 늦은 아이였다. 주변에서도 말이 좀 늦된 것 같다고 이야기해줄 때마다 나의 불안함과 조급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럴 때마다 “괜찮아, 한국에 살면서 한국말 하나 못하겠어. 좀 더 기다려보자. 우리가 더 많이 노력해보자.”라고 다독여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말이 늦는 게 꼭 내 책임인 것만 같았다.  우리 아이도 언젠가는 또래들처럼 말하게 될 거라는 희망고문과 함께 눈물로 지새운 날들이 늘어만 갔었다. 몇 년째 고민했던 문제들을 여섯 살 신학기 상담 때 다시 듣게 되니  이제는 피할 수 없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역 맘 카페에서 언어치료라고 검색만 해도 수백 개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디로 가야 좋을까? 대학병원? 개인 언어치료실? 집 근처 대학병원 언어재활과에 전화도 해보고 지역 내 언어치료실 검색도 해보다 결국 집과 가장 가까운 언어치료실을 선택했다. 아이가 유치원을 마치고 갈 수 있는 거리여야 꾸준히 갈 수 있고 아이도 나도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는 곳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우리 집에서 차로 5분 내외 거리인 치료실로 결정을 했다.     


첫 상담 전 사전검사를 진행했다. 나는 300여 개의 양육 관련 문항을 체크하였다. 300번의 문항이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무거워졌다. 검사가 끝나고 아이의 이름이 호명되었고 드디어 상담실 소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겠네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탓 아니에요.”

상담실 소장님의 말씀은 오랫동안 캄캄했던 내 마음의 방에 스위치를 켜준 것만 같았다. 스위치가 켜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흘렀다. 내 탓인 것만 같았던 걱정과 죄책감은 그림자처럼 나를 오랫동안 따라다녔었다. 어쩌면 나는 아이가 문제없다는 말보다 엄마 탓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은 이기적인 엄마였나 보다.


“아이가 기질적으로 완벽주의예요. 본인이 준비가 되야지만 말을 하려 했던 거니 걱정하지 말아요.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도 사랑받는 아이가 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지금부터 아이랑 함께 발음 교정부터 시작하죠.  치료 시기가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지금 잘 오신 예요.”


그토록 궁금했던 아이의 늦된 발달 이유를 알게 되었고 상담을 통해 아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의 늦됨이 미안해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갈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해보고 싶었던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았었다. 이젠 더 이상 타임머신을 찾지 않아도 된다.

          

첫 상담에서 아이는 1년 6개월의 치료 계획을 세웠고 매 회차 아이는 거울을 보며 본인의 감각을 활용해 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를 배워나갔다. 아이가 치료실에 다닐 때도 늘 언어치료사 선생님의 지도에 맞춰 집에서도 하루 세 번 밥 먹듯 놀이처럼 복습을 했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입 모양을 관찰해보기도 했고 아이와 낱말카드를 놀이로 접근해 자주 말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와 달리 6개월쯤 지났을 땐 치료의 끝이 보이지 않자 나에게 불안감과 우울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잘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처음 마음과 달리 나도 힘들었던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언어치료 선생님과 수업 후 상담할 때마다 마음이 힘들기도 해서 우는 날도 참 많았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 어떤 부분이 가장 걱정되세요? " 나의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인지 물어봐 주시고 조언해주신 선생님 덕분에 힘들었던 순간순간을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아이의 치료와 엄마인 나의 마음까지 보듬어주신 선생님께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아이가 말이 늦을 때마다 내가 가장 바라던 건 어쩌면 아이가 유창하게 말하기보다                                  

 "어머니 탓 아니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아이마다 말하는 시기가 다 다르잖아요. 늦는 아이가 있으면    빠른 아이가 있는 거잖아요." 이 한마디였나 보다.     


상담실을 다녀온 날 유독 지쳐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은 아이에게 오늘은 어떤 말놀이를 배웠냐고 물어보며 나 대신 아이의 복습을 함께 해주었다. 첫째 아이도 동생이 배운 자료를 보며 복습을 해주기도 했다. 엄마, 아빠보다 더 애써준 첫째 아이였다. 온 가족이 둘째 아이를 위해 자료를 파일에 모으고 매 회차 배운 내용을 아이가 잊지 않도록 함께 놀이처럼 해주었다.


아이도 1년쯤 발음 치료를 받자 발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의식해서 정확하게 발음을 구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아이의 큰 노력과 가족들의 노력 덕분에 예상했던 기간보다 5개월 빨리 치료 종료가 되었었다.     

“어머니, 다음 달까지만 진행하고 더 이상의 치료는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모른다. 마지막 치료 종료일이 우리에겐 오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날들이 무색하게 어느 날 우리에게도 찾아왔다. 엄마보다 힘들었을 텐데 1년 동안 씩씩하게 잘 다녀준 둘째   아이에게도 너무 고마웠다. 나만 힘든 거라 생각했던 순간들이 미안하고 부끄러워 아이 손만 꼭 잡아보았다. 아이는 일곱 살이 되던 3월에 언어치료가 종료되었고 우리 가족만큼 유치원 담임선생님께서도 아이의 변화에 기뻐해 주셨다.     



작년 3학년 여름 방학식 날 받아 온 아이의 생활 통지표에 내 눈을 의심할 문장이 적혀있었다.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 생활 통지표를 가져왔나 싶어 이름을 몇 번이나 확인했었다.


“여보, 생활 통지표에 이렇게 적혀있어. 또래에 비해 어휘를 많이 알고 있어 문장 표현 및 발표를 참신하고   재미있게 잘함.” 글자 하나하나 소리 내 읽으니 남편도 흐뭇하게 둘째 아이를 바라보았다.   멈추어 있을 것만 같아 불안해하던 시간들도 어느새 기억 저 편에 자리 잡게 되었다.


언어가 늦된 아이였지만 믿고 기다려준 만큼 감사하게 잘 자라주었다.


올해 4학년이 된 둘째 아이는 한국사며 세계사며 자신이 아는 이야기들을 쏟아내느라 우리 집에서 가장 수다쟁이가 되었다. 한국사 책을 읽고 질문을 만들어 가족들을 따라다니며 퀴즈를 내기도 하고 자신이 알게 된 역사정보를 가족들에게 알려주기 바쁜 아이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을 텐데 어떻게 참았나 싶을 정도로 자기 전까지 이야기하며 잠들 정도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못했던 말들 이제 다 들어줄 테니 밤새 이야기해보자. 나도 꼭 해보고 싶었던 너와의 수다 시간이었으니깐.’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힘든 순간들이 예고 없이 찾아오게 된다. 아이가 부족한 부분이 보이면 내 탓인 것만  같고 나한테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어 혼잣말을 수백 번도 더하곤 했다. 엄마의 무거운 마음과 달리 아이는 밝게 잘 자라주었고 치료인지 놀이인지 모를 정도로 말놀이 하러 언제 가냐고 물어보곤 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아이들과 작은 화분에 씨앗을 심고 언제쯤 싹을 틔울지 기대하며 물을 주고 기다리곤 한다.  어떤  씨앗은 빨리 싹을 틔우지만 어떤 씨앗은 예상했던 시기보다 늦게 싹을 틔워 더 자주 화분을 들여다보게 된다. 우리 아이들도 저마다 싹을 틔우고 꽃이 피는 시기가 다 다르다는 걸 아이를 키우며 배우고 있다. 아이를 기다려주는 시간만큼 엄마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 되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그해 봄에 심었던 씨앗 중에 가장 향기로운 꽃향기를 맡게 됨을 아이가 그렇게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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