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싱가포르로 가도 괜찮을까

by 해피피존

2018년 3월.
싱가포르 클라키의 한 호텔방.
자고 있다가 갑자기 숨이 안 쉬어졌다. 그냥 답답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숨'이. '안'. '쉬어졌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호텔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인생 처음으로 ‘공황장애’라는 걸 겪은 날이었다.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온 지 한 달쯤 됐을 때다. 그 이후로 1년 6개월을 싱가포르에서 근무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공황장애는 나보다 훨씬 더 오래 남아있었다. 대부분의 날은 괜찮았다. 하지만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안 쉬어지고, 마치 어딘가에 갇힌 느낌이 들었다. 특히 감기 기운이 있을 때나 커피를 마시면 증상이 더 심해졌다. 약 2년쯤 그렇게 살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정신과를 3개월 정도 다녔다.

그 이후론 카페인 금지령을 스스로에게 내렸고, 탄산음료는 거의 끊다시피 했고, 복식 호흡, 명상, 운동... 별의별 걸 다 해봤다. 그 덕분에 조금은 괜찮아졌지만, 불쑥불쑥 옛날의 그 느낌이 다시 찾아올까 봐 늘 불안했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싱가포르로 이직할 기회가 생겼다. 솔직히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어... 거기서 공황장애 시작됐잖아...? 괜찮을까?’였다. 낯선 환경, 언어, 음식, 문화, 사람들, 새로운 업무까지.

'나는 과연 잘 버틸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싱가포르로 왔다. 그리고 지금, 정착한 지 약 5개월이 지났다. 놀랍게도 — 정말로 놀랍게도 — 단 한 번도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왜일까?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그걸 생각해보려고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내 머릿속을 뒤적거려보니, 네 가지 정도의 이유가 떠올랐다.


1. 술을 거의 안 마신다

한국에선 자주는 아니었지만, 한 번 마시면 **묻고 더블로 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 오고 나서 술을 마신 날이 손에 꼽힌다. 특히 아내가 뒤늦게 싱가포르에 합류한 이후로는, 거의 제로. 신기하게도 술을 안 마시니 마음이 좀 더 고요해졌다. (물론 간도 고마워했을 거다.)


2. 나 자신에게 기대를 덜 걸게 됐다

박사 학위, 취업, 커리어... 한국에선 늘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그건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능력 대비 과욕"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 같다. 싱가포르에선 영어로 일해야 하다 보니, 애초에 완벽한 퍼포먼스를 내려는 기대 자체가 사라졌다. ‘내 영어는 이 정도다. 괜찮다. 못 알아들어도, 오케이다.’ 그냥 그렇게 내려놓으니 오히려 일이 잘 되더라.


3. 쓸데없는 정보에서 자유로워졌다

한국에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회사 가십, 남 이야기, 비교와 경쟁... 그게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선 대화가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등등 일단 무슨 말을 해도 안 들린다. (들리더라도 반쯤만 들린다. 이게 참 복이다.) 그래서인지, 남들 이야기에서 한 발짝 멀어질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평화였다.


4. 관계가 단순해졌다

여기엔 가족도, 친구도 없다. 오로지 아내와 나. 물론 새로운 인연도 생기긴 했지만, 한국에서처럼 끊임없이 누군가와 엮이고, 만나는 일은 없다. 그 덕분에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않고 오롯이 하나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게 의외로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싱가포르에서 가장 걱정했던 건 ‘건강’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좋아진 것도 ‘건강’이다.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그래서 계속 살아볼 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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