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생존기 1.
밤공기는 왜 유독 그렇게 찰까.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거닐다 보면 그 찬 공기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차갑고 아프게 느껴진다.
아빠는 오늘도 술을 마시고, 얼굴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눈빛은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거칠고 공격적이었다.
엄마에게 욕을 쏟아 낸다. 엄마는 식당에서 일을 하느라 밤 10시가 다 되어 집에 왔건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 그냥 무조건적이고 원초적인 공격대상이 된다.
"이 호로년이"
꼭 저런 식으로 욕을 한다. 가장 가까운 남편이라는 사람이 아내에게 저런 모진 욕을 한다. 아빠가 술을 계속 마실수록 누나와 난 겁이 나기 시작한다.
"방으로 들어가라"
또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초등학생이 버티기에는 너무 큰 심장의 움직임이다. 누나와 난 한 이불속에 누워 귀를 쫑긋하며 안방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제발...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이루어 지지도 않을 주문을 계속 외운다.
안방에서 간간이 들리던 대화 소리가 줄어든다. 이 순간이 제일 겁이 난다. '엄마가 어떻게 된 건 아닐까? 어쩌지. 얼른 안방으로 뛰어갈까?' 누나와 난 눈이 마주친다. 누나가 용기 내어 먼저 말한다. "가보자."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안고 1초도 안 걸리는 2m 거리의 안방으로 뛰어가 보면, 아빠는 짐짓 왜 우리들이 달려왔는지 알고 있으면서 모른 채 한다. 엄마는 반가우면서도 아이들이 새벽까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다. 엄마는 말한다. "괜찮아, 얼른 자."
방으로 돌아온 누나와 나는 따뜻한 이불을 다시 덮는다. 그렇지만 귀는 여전히 안방으로 향해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안방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한다.
누나는 내게 자지 말라고 한다. 자지 말고 소리에 집중하라고 한다. 그렇지만 난 너무 잠이 온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든다.
안방에서 큰 소리가 난다. 누나와 난 다시 안방으로 뛰어 간다. 엄마가 아빠한테 뺨을 맞은 것일까. 아빠는 소주병을 던진걸까. 분위기가 차갑다. 엄마는 새벽 3시까지 아빠를 달래고 버텼지만 오늘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누나와 나는 얼른 방으로 가서 몰래 외투를 챙기고, 현관문 옆에 숨겨둔다. 여차 하면 밖으로 도망갈 준비를 한다.
마의 시간.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 아빠는 스스로 마의 시간이라고 칭했다.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욕을 쏟아 내고, 때릴 듯이 손을 휘적휘적하는 시간.
엄마와 나 누나, 이 셋은 눈빛으로 이야기한다. '문 앞에서 만나자.' 그렇게 취약한 엄마를 먼저 내보낸다. 누나와 난 아빠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하면서 몰래 나갈 기회만 엿본다. 아빠가 고개를 떨구고 잠시 기운이 빠졌다. 이때 나가야 한다. 누나와 난 동시에 현관문으로 살금살금 이동한다. 그리고 재빠르게 옷을 챙겨 대문 밖으로 나간다.
대문 앞 노란 가로등 앞에서 엄마와 나 누나 셋이 다시 만났다.
"얼른 골목에서 벗어나자."
비록 도둑고양이처럼 새벽에 집을 뛰쳐나온 셋이었지만, 심장은 더 이상 쿵쾅쿵쾅 하지 않는다. 갈 데도 마땅히 없지만 상관없다. 이 셋에게는 정말 행복한 순간이다.
정처 없이 동네를 떠돈다. 그러다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까지 왔다. 초등학교에는 많은 전설이 있다. 유관순 열사의 동상은 밤 12시가 되면 옆으로 15도 움직인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운동장을 돌아다니며 체력단련을 한다. 이런 많은 전설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새벽에 이 동상들은 움직이지 않고 생명력 없이 가만히 있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이미 많은 것을 알아버린 날들. 난 상관없었다. 지금 집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더 안전하게 느껴졌고, 이거면 충분하다고 느꼈다.
엄마는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 중이다. 누나는 엄마 옆에 꼭 붙어 앉아 말없이 동반자가 되어 준다. 나는 속 없이 구령대를 왔다 갔다 하며 철이 없는 척을 한다.
잠은 쏟아지고, 몸도 춥지만 엄마에게 내색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힘들 사람은 엄마니까. 몸도 마음도.
엄마가 결정을 했다. 옆 동네에서 세탁소를 하는 엄마의 사회친구 집으로 가기로. 고민할 것도 없었다. 새벽에 집을 뛰쳐나오면 8할은 세탁소 이모네로 향했다.
핸드폰이 없던 90년대 후반, 세탁소 이모가 문을 열어 줄거란 확신도 없는 채 일단 세탁소로 간다. 조용한 새벽. 그 골목에서 엄마는 조용히 문을 두드리며 세탁소 이모를 부른다. "수지야~ 문 좀 열어줘~"
세 번 정도 불렀을까. 귀신 같이 방에선 금방 불이 켜지고. 세탁소 이모가 버선발로 문을 열어준다. "으이그. 춥지. 얼른 들어와 내 새끼들."
세탁소 이모네 문간방에는 잠옷을 갖춰 입고 먼저 자고 있던 아이들이 있다.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인 수지와 광모. 우리가 또 집에 온 걸 알면서도 이들도 눈치껏 모른척하며 계속 잠을 청한다. 고맙고도 미안한 사이.
세탁소 이모는 아저씨와 위장이혼을 했다. 아저씨가 도박 빚이 많아 가족에게 까지 피해를 줄 수가 없어 위장이혼을 택했다. 그런데, 그 위장이혼은 10년이 지나 독이 되어 돌아왔다.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져 위장이혼이 아니라 진심이혼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그렇게 또 남의 집에서 신세 지며 4시간이라도 얼른 눈을 붙여본다. 내일은 또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가야 하니까. 엄마는 또 아무렇지 않게 식당으로 일하러 가야 하니까.
아빠는 오늘도 술을 마실까. 아니면 멈출까. 학교에 있는 내내 초등학교 3학년의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다. 점심밥을 먹고 축구를 하던 중간에도 온통 그 생각뿐. 그렇지만 그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는다. 내겐 아무렇지 않은 날들이니까.
하교 후 집에 가보니 술병만 널브러져 있고 아빠는 없다. 그런데 왠지 드는 그 불길한 느낌. '지금도 밖에서 술을 마시고 있구나...' 오늘 밤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 심장은 찌릿하지만, 얼굴로는 속상한 표정을 숨겨본다. 아무도 없지만 굳이 표정을 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