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도 뭔가 부끄러웠단 말이야

딸들한테 화내고 나서 씁니다 2.

by 소년의 초상

지난 겨울 가족끼리 1박 2일 일정으로 무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무주리조트를 노리고 간 것은 아니고, 무주관광단지 인근에 새로 만들어진 좋은 숙소가 있어서 가족과 함께 다녀왔다.


우리 가족이 갔던 숙소는 뭐랄까 되게 유명한 건축가가 만든 듯 스토리가 있어 보였고, 시설 또한 신경 써서 새로 만들었던지라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곳에서 가장 멋졌던 것은 바닥 밑으로 뻥 뚫린 자쿠지였는데, 우리 가족 네 명이 들어가면 조금 좁지만 나만 빠져 준다면 세 여자들끼리 즐겁게 반신욕이 가능한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만 들어가고 다음날에는 눈치껏 빠져주었다.




이번 여행은 밖으로 다니는 일정 없이 오로지 숙소에서만 지내기로 했다. 아내가 정말로 숙소를 마음에 들어 했다. 디자이너로써 영감이 떠오른다나...


그래서 음식도 배달로 시키고, 안에서 내복만 입고 돌아다녔다. 아이들 역시 너무나 좋아했다.


다만, 여행 당일이 굉장히 추웠기 때문에 날씨에 적응이 안 되어서 자기 전에 방안 온도를 30도로 설정해 놓고 잠이 들었다.


그랬더니 새벽 세시쯤 우리 가족 모두는 화생방에 시달렸다.


둘째의 울음을 시작으로 모두가 잠에서 깨어났고, 첫째 역시 둘째를 원망하면서도 본인 역시 호흡기가 답답하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너무 건조했다.


아내는 살기 위해 에어컨을 틀었다. 이런 사치가 따로 없었다. 어찌어찌하여 간신히 새벽을 보내고 다음날이 왔다.


요즘 퇴실이 무척 빠르기 때문에 아침의 여유를 즐길 시간도 없이 곧바로 짐 싸기에 돌입했고 숙소도 치웠다. 이럴 거면 왜 돈 내고 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무주에서 일정이 숙소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무언가 아쉬웠다.


세 여자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스키장 가볼까?"


우리 가족 중 누구도 태어나서 한 번도 스키장을 가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눈썰매장이 전부였다. 완전 촌놈들이었다.


스키장을 가본 적이 없었으니 그 멀리 무주까지 여행을 가면서도 스키 한 번 타볼 생각도 안 했던 것이다. 어찌 됐든 내가 용기 내어 스키장에 가볼 것을 제안했다.


아내는 갑자기 스키를 타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냐며 만류하였다.


그렇지만 내 의도는 스키를 타는 데 있지 않았다. 현장견학이었다.


스키장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고, 분위기는 어떻고,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스키를 배우는지, 이 모든 것을 확인하러 가는 현장견학이었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자, 아내는 헛웃음을 치고 아이들에게 물어보라며 대답을 피했다.


둘째는 뭐든 좋다고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고, 첫째에게 물어보았다.


"첫째야, 스키장이라고 있는데 산 위에서부터 썰매 타고 내려오는 거야. 엄청 크대. 가면 눈사람도 만들 수 있고, 사람도 되게 많은 곳이야. 한 번 가볼까?"

"응 좋아, 가보자! 눈 사람 만들자!"


첫째는 스키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냥 눈사람만 만들고자 하는 듯 보였는데, 그래도 오케이 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우리 가족은 무주스키장으로 출발했다.


어렸을 적부터 스키장을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성인이 되어서 여유가 생겨도 굳이 스키를 타지는 않았다. 사는 게 바빠서 그랬을까, 왜 이제야 와봤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산속으로 맹렬히 운전을 했다.


약간 실망했다. 무주스키장도 많이 낡은 듯 보였다. 층층이 많은 야외 주차장이 있었지만 주차된 차는 없었고, 건물들도 낙후되어 있었다. 왕년의 역사만 남은 한 첫 느낌이었다.


"여보, 생각보다 별로네~. 낡았다, 낡았어."

"그러게, 별로네에..."


아내가 말을 흐리는 순간, 슬로프가 보였다. 우와. 이렇게 크다니, 우리 네 가족은 모두 우와를 남발했다. 촌스럽게.


그렇게 슬로프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얌체주차를 하고, 리프트가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매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대충 시스템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별 것 아니네'


첫째와 둘째는 곧바로 눈이 있는 슬로프 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살짝 눈치가 보여서 고개를 돌려보니 우리 가족과 같은 이들이 몇 있어 보였다.


마치 우리 가족처럼 현장견학을 온 것 마냥 아이들은 철 없이 놀고 있고 부모들은 슬로프 밖에서 쭈뼛쭈뼛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면서 우리 아이들 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다.


그러자 첫째가 내게 말했다.


"아빠 들어와~ 같이 눈사람 만들자."

"둘째랑 만들어 그냥. 아빠 밖에 있을게."

"들어와, 들어와~ 응? 눈사람 만들자. 응?"


나는 괜히 어른까지 들어가서 놀면 꼴불견일 것 같아서 들어가고 싶지 않아 계속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었다.


그럼에도 첫째는 계속해서 들어오라며 떼를 썼다. 왠지 본인도 어색하고 부끄러우니까 아빠가 옆에 있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때 나는 화를 내고 말았다.


"아빠 안 들어간다니까. 스키장 눈은 뭉쳐지지도 않아. 눈사람 못 만들어."


그러자 첫째는 조용히 눈치를 보며 뭉쳐지지도 않는 눈을 이리저리 만졌다. 둘째도 뭔가 눈치를 챘는지 어색하게 노는 것이 보였다. 미안했다.


스키장은 괜히 가서 체면 차리다가 아이들에게 화만 낸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진짜 스키장 눈으로는 눈사람을 만들 수 없었다. 뭉쳐지지 않는 눈이니까.




스키장을 걸어 내려오다 보니 숙소 인근에서 편의점이 보였다. 괜히 화를 낸 것이 미안해 아이들을 데리고 편의점으로 가서 간식을 사주면서 화해를 청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집으로 출발하였다.


운전을 하고 가는데, 우리 집 세 여자들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과자를 먹으면서 유튜브도 보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마치 아빠가 화를 낸 적 없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나는 괜히 화내서 마음이 무거운데... 그래도 다행이다. 쿨한 우리 집 여자들이라서.


"그런데 첫째야, 사실은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빠도 스키장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고, 뭔가 부끄러웠어. 다른 사람들은 자주 와본 것처럼 스키도 잘 타고 노는데, 우린 그렇지 않았잖아. 아빠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너희들과 즐겼어야 했는데 못 그랬던 것 같아. 다시 스키장 가면 절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게. 용서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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