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생존기 8.
아빠가 교도소에 들어갔다. 가정폭력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음주운전에 걸렸고,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뜻밖에 우리 셋은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비록 돈은 조금 쪼들리는 삶을 살았지만 정말 마음 하나는 편했기 때문에 잠도 잘 잤다.
엄마는 그해 여름방학 정말 최선을 다해 우리를 돌봐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귀찮아 가기 싫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 챙겨주었다. 이런 게 가정의 따뜻함인가.
엄마는 아빠가 없는 동안 누나와 나에게 각별한 신경을 썼다. 현장견학도 곧장 보내주었고, 롤러스케이트장도 데리고 갔다. 처음 먹어본 조각케이크도 사주었으며, 백화점에 가서 축구화도 사주었다.
한 달에 한 번은 집 앞 농협하나로마트로 가서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도 몽땅 사주었고, 저녁에는 고기도 구워 먹었다. 정말 행복했다.
가장 기억나는 것은 엄마가 일하는 식당 앞에서 있었던 일이다. 엄마는 누나와 나를 식당 앞으로 불렀다. 근처에 소림사에서 온 중국인 꼬마애가 공연을 한다는 것이다.
엄마는 그 공연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와 정말 신기했다. 나보다도 작은 애가 탄탄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텀블링을 하는 것이 정말 멋졌다.
엄마는 우리를 공연장에 넣어 두고 다시 일하러 갔다. 그리고 끝날 무렵에 다시 공연장으로 왔다. 엄마는 그냥 보내기에 아쉬웠는지 바로 앞 빵집에서 달달한 조각 케이크를 사주었다. 그리고 엄마는 한 입도 먹지 않고 가게로 다시 일하러 갔다.
"이거 누나랑 천천히 먹고, 버스 타고 조심히 집에 가. 알았지? 집에 가서 만나. 얼른 가."
그렇게 엄마는 총총총 신호등을 건너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맛있는 조각케이크를 한 입도 먹지 않고 곧장 일하러 갔다. 30년이 지나도 그 모습이 생생하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됐다. 제법 추워졌다. 엄마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왔다. 그때까지 누나와 난 둘이서 잘 지내야 했다.
오후 5시쯤이면 보일러를 킨다. 안방만 보일러를 열어놨다. 방이 금방 따뜻해진다. 누나는 저녁밥을 차린다. 조촐하지만 둘이 잘 챙겨 먹는다. 그리고는 따뜻한 이불에 꽁꽁 누워서 엄마가 올 때까지 TV를 본다. 시간이 흘러 엄마가 집에 돌아와 우리를 안아준다. 틀에 박혀있는 하루지만 제일 행복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밤 12시가 되어서도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오늘은 좀 늦나 보다' 하고 누나와 난 잠이 들었다. 새벽 5시. 전화벨이 울린다. 삼촌이다. 집 앞에 있으니까 점퍼만 챙겨 입고 얼른 나오라고 한다.
삼촌의 엘란트라를 타고 곧장 병원 응급실로 갔다. 왜 응급실로 가는지 대충 감이 왔다. 불길한 예감. 엄마는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얼굴과 손등에 상처가 있었고, 몸은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엄마는 그 와중에 우리를 보고 웃어주었다. "엄마 괜찮아. 잠은 잘 잤어?"
삼촌이 말해주었다. 엄마는 진작 어젯밤에 교통사고가 났는데 누나와 내가 자야 한다며 전화를 못하게 했다고 한다.
얼른 병실로 옮기고 수술에 들어갔다. 비상이었다. 우리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우리는 고모에게 맡겨졌고, 고모집에서 얹혀사는 생활이 시작됐다.
사고의 과정은 이랬다. 엄마는 일이 끝나고 회식을 했는데, 회식 자리에서 어떤 남자가 엄마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엄마는 곧장 택시를 탔고 집 앞 대로변에서 내렸다. 무단횡단을 해서 가는데, 탔던 택시가 유턴을 하여 그대로 엄마를 친 것이다. 무슨 사고도 이런 사고가 있을까.
그 택시기사는 사정이 딱해 합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간신히 수술을 마치고 병원 생활을 할 정도밖에 돈을 받지 못했다. 그렇게 6개월 간의 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대충 짐을 싸서 고모집으로 갔다. 고모집은 시골집이라서 방은 넉넉했지만 화장실도 밖에 있고 여간 불편한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누나와 난 그렇게 눈칫밥을 먹고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방학도 시작됐기 때문에 멀리 학교까지는 가지 않아도 됐다. 대신 출근처럼 아침마다 엄마 병원으로 갔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 겨울이었다.
고모는 정말 잘해줬다. 사촌 누나도 잘 챙겨줬다. 치매 걸린 사돈 어르신도 우리를 이뻐해 주셨다. 다만, 먹을 것에 집착이 심해서 가끔 주먹질을 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날이 많았다.
그런데 누나는 고모집에서 며칠 지내지 않고, 엄마의 병원으로 가버렸다. 누나는 사춘기 중학생이었고, 고모집에서 눈칫밥을 먹는 것보단 엄마의 바로 옆 침상에서 지내는 게 마음 편했나 보다. 그렇게 나만 고모집에서 지냈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다.
고모 아들, 즉 우리 중 제일 나이가 많았던 봉식이 형이 그해 겨울 취업계로 다른 지역 공장에 취직했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매일 마른반찬에 밥만 먹었는데 그날은 소불고기까지 대령해 있었다. 너무 먹고 싶었다. 형이 저녁 빨리 오길 바랐다.
침만 삼키다가 사촌 누나에게 "와 고기 진짜 빨리 먹고 싶다. 정말 마시고 싶다."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사촌 누나는 그 이야기를 모두가 앉아서 식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말해버렸다. 너무 창피했다.
아무튼, 그렇게 세월이 흘러 다음 해 4월이 됐다. 고모집에서 초등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학교가 마치면 엄마 병원으로 갔다. 거리가 좀 있었는데 그 돈이라도 아끼려고 걸어서 다녔다.
중간에 유일한 낛으로 오락실에 들려 펌프도 하고 갔다. 또 다른 진심, 컴백, 펑키투나잇 등 한 판에 200원. 버스비 대신이었다. 그리곤 다시 태권도 학원까지 걸어갔다. 태권도도 나의 해방구였다. 태권도에서 제일 친한 친구와 운동하는 게 좋았다.
엄마는 돈 부담이 있었겠지만 난 그 눈치를 알면서도 태권도를 계속 다녔다. 안 그러면 미칠 것 같았다. 태권도가 끝나면 다시 버스를 타고 고모집까지 갔다. 그러면 시간이 밤 8시였다.
고모는 작은 상에 내 밥과 반찬만 따로 빼놨다. 난 그 밥상을 항상 맛있게 받아먹었다. 어찌 됐든 정성과 사랑이 깃든 밥상이었다.
엄마가 서둘러 퇴원 준비했다. 아직 골반과 다리가 낫지 않았는데 급하게 퇴원을 하려고 했다. 엄마가 6개월 만에 집에 가보자며 옷을 갈아입었다. 엄마는 한쪽에 목발을 하고 한쪽은 나에게 기대어 택시를 탔다.
집은 사람이 사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동안 1층 주인아줌마의 배려로 월세도 내지 않고 짐을 그대로 두었는데, 정말 고마운 분이셨다.
사별하시고 혼자 사시는 분이었는데, 우리가 불쌍했는지 항상 잘 챙겨주셨다.
엄마가 빨리 퇴원 준비를 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빠가 출소할 날이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겐 남편이 해외로 돈 벌러 갔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그런데 술 주정뱅이 남편이 돌아오니 서둘러 병원을 나가야 했다. 그래서 결국 아빠가 출소하기 전에 퇴원하고 통원으로 치료를 받았다. 다리의 철심을 빼지 못했는데도 통원으로 치료를 받았다.
엄마는 그렇게 1-2년 치료만 열심히 받고 일을 하지 못했지만, 아빠의 히스테리와 괴롭힘으로 결국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오후 서빙일을 시작으로 다시 지독한 식당일로 돌아갔다.
엄마의 다리에는 여전히 철심이 박혀 있다. 당시 3년 안에 철심을 빼는 수술을 받았어야 했는데 사는 것도 바쁘고 여유가 없어 엄마는 결국 철심을 빼지 못했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몸에 철심이 박혀있다.
엄마는 전생에 무슨 잘못을 해서 그렇게 모진 세월을 살아야 했던 것일까. 엄마는 지금도 식당일을 가끔 나간다. 요양보호사, 산모신생아건강관리사 등 자격증을 취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일만 고집한다. 당신 몸은 이미 식당일에 적응이 돼서 제일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몸에 굳은살이 배겼다면서.
혼자가 된 엄마는 24평 아파트를 정말 예쁘게 꾸미고 산다. 식물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식물을 키우고, 구피도 키운다. 이렇게 생명을 좋아하고 집 꾸미기를 좋아했던 사람이 평생 월세만 전전하며 살았으니, 짠한 마음이 든다.
엄마는 비록 예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여전히 무릎을 굽힐 때 힘줄이 당기는 고통이 있지만, 지금이 좋다고 한다. 모든 걸 잘 이겨내고, 씩씩하게 살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엄마가 행복하게만 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