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생존기 7.
90년대에는 만득이 시리즈가 유행했다.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다. 여자가 혼자 집을 가고 있는데, 자꾸 뒤에서 "같이 가 처녀" 라며 남자가 따라왔다. 여자는 치안인 줄 알고 얼른 도망갔는데, 뒤에서는 계속 쫓아오면서 "같이 가 처녀"라고 말했다.
여자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결국 파출소로 뛰어 들어갔고, 경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은 곧바로 뒤따라 오던 남자를 붙잡았다.
"왜 자꾸 여자를 따라다닙니까?"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갈치가 천 원~~ 나 갈치 팔고 있는데 무슨 소리예요?"
같이 가 처녀~ 갈치가 천 원~ 유쾌한 만득이 시리즈다.
만득이 시리즈는 전남 구례에서 독파했다. 거의 여름 한 달간 구례 피아골 산장에서 살았다. 살고 싶어서 산 것은 아니었다. 그 해 여름도 아빠의 가정폭력을 피해 엄마와 나 누나 셋은 구례 피아골 산장으로 갔다.
1998년도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아빠는 또 심한 폭력을 행사했다. 우리 셋은 집을 나왔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고 엄마도 일을 그만둔 상태라 굳이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됐다.
우리는 고모에게 가보았다. 고모는 차라리 아는 사람이 구례에서 산장을 하니까 여름에 일 손도 필요하고 하니 거기에 가서 애들도 놀게 해 주고 엄마도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엄마에게는 좋은 선택지였고, 짐도 챙기지 않고 거의 맨몸으로 구례 피아골로 갔다. 정말 빤쓰 한 장 여분도 없이 그대로 갔다. 가는 길이 정말 험했는데 나는 마냥 신났다.
물놀이도 거의 못해보고 살았는데 오랫동안 물놀이를 해도 된다는 기대감이 놀이동산을 가는 것 마냥 설렜다. 물론 엄마는 걱정이 더 컸을 것이다.
도착해 보니 엄마보다 나이는 15살 이상 많아 보이는 인상 좋은 부부가 맞이해 주었다. 고모의 오랜 지인이라고 했다. 두 부부는 특히나 누나와 나를 굉장히 반겨주었다.
곧바로 산장의 방을 안내해 주었는데 정말 넓고 쾌적했다. 이런 곳에서 한 달을 지낸다고 생각하니 정말 행복했다. 집 걱정은 1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여름의 구례 피아골 여름캠프가 시작됐다.
엄마는 주방 보조일부터 서빙까지 만능으로 일을 했다. 누나는 그럭저럭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산장에 전용 피아골 계곡이 있어서 맨날 내려가서 놀았다.
계곡물이 너무 차서 10분 이상 놀지는 못했지만 정말 깨끗한 물에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난 튜브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얕은 물에서만 놀아야 했고, 조금의 답답함이 생길 때쯤 다른 친구가 산장에 도착했다.
철우는 나와 동갑이었다. 이 친구의 사정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엄마가 몰래 알려주기를 저 집도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주일 정도만 이곳에 머물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심했는데 잘 됐다.'
처음에는 잘 지냈다. 나한테는 튜브가 없었지만 철우에게는 튜브가 있어서 빌려서 탔다. 이 때문에 철우의 눈치를 보면서 지냈다. 그런데 이 친구, 성격이 별로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게 기분이 나빴다. 지금도 그 건방진 행동이 약간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내가 발로 걷어차버렸다. 일방적으로. 난 싸움을 되게 잘하고 겁이 없었다. 가정폭력의 영향이었을까.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철우는 며칠 안 있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튜브도 가져가 버렸다. 아쉽긴 했지만 못된 놈 혼내줬단 생각에 뭐 크게 아쉽진 않았다. 나는 다시 얕은 물에서만 놀기 시작했다. 어렸지만 계곡의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산장 일에 완벽히 적응하여 죽순도 맛있게 잘 무치고, 백숙도 아주 잘 삶았다. 두 테이블, 세 테이블, 동시에 손님이 와도 끄떡없었다. 모든 게 잘 맞아떨어지는 생활이었다.
밤에는 전설의 고향 재방송만 계속해서 봤다. 시골이다 보니 TV채널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볼 수 있는 게 전설의 고향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이불을 코끝까지 올려놓고 눈만 뻐끔뻐끔 보았다. 더워서 땀이 나도 계속 그 자세로 TV를 시청하고, 오줌도 참았다. 그래도 재밌었다.
엄마와 나 누나가 그렇게 평화롭게 있는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행복한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그러다가 구례 피아골에서 물난리가 났다. 당시 역대 최대치의 폭우가 내렸고, 최소 수백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가 나왔다. 물난리가 얼마나 심했냐면 집체만 한 바위가 그대로 굴러 다녀서 계곡의 모든 생태계를 파괴시켜 버렸다. 그 맑던 물이 흙탕물이 됐고, 회복되지 못했다.
모든 물줄기가 방향을 바꾼 데다가 물이 탁해져서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무원들은 피아골 계곡에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한 순간에 손님이 끊겼기 때문에 우리가 마냥 그곳에 머무르는 것은 어려워졌다.
고모에게 다시 연락을 했더니 우리가 없는 동안 아빠가 마음 잡고 고물장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치질이 걸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엄마는 그래도 남편이라고 걱정이 됐나 보다. 우리들은 구례에 머물게 하고 엄마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일주일 정도 누나와 나만 구례에서 생활을 했다.
물놀이도 하지 못하고, 손님도 없는 그 적막한 곳에서 있자니 이제는 우리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엄마에게 연락을 해서 우리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아빠는 치질 때문에 한 동안 술을 마시지 못했다. 덕분에 그해는 가을까지 얌전한 세월을 보냈던 것 같다.
그렇게 구례에서의 재밌었던 세월을 잊고 살 무렵, 중학교 2학년 때 동네 시장에서 구례 산장 부부와 마주쳤다. 뜻밖의 만남에 너무 반가웠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때 물난리 이후 장사가 안되어서 산장을 접고 다시 도시로 나와 시장에서 채소가게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부부는 평생 자식이 없었다. 애가 들어서지 않았다고 들었다. 마음씨 좋은 부부가 일이 풀리지 않는 모습을 보니 사춘기 마음에도 썩 속상했다.
지금은 그분들이 어떻게 사시는지 모르겠다. 소식을 못 들은 게 20년도 넘었다. 진즉에 한 번 찾아뵀어야 하는데, 나도 참 무색한 것 같다. 30년 전, 사는 게 고달프던 어린 나에게 동화책 한 장 같은 챕터를 만들어주셨던 그 부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