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생존기 6.
엄마가 90년대 중반, 24시 해장국집 서빙 일을 하던 때였다.
야간반이었기 때문에 아침에 퇴근한 후 누나와 나를 돌보던 시절이라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빠는 술 마시고 간간히 엄마에게 폭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뺨 싸대기나 머리채를 잡는 정도였다. 물론 심한 욕을 하면서 정서적, 언어적 폭력도 함께 행사했다.
요즘 시대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바로 징역 갔을 텐데 나나, 우리 가족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 같다.
그런데, 심한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아빠의 고삐 풀린 무자비한 폭력이 일어났다. 내 인생에 눈으로 목격했던 첫 번째 가장 잔인한 순간이었다.
아빠는 술을 마시면 새벽 내내 잠을 자지 않았다. 이상한 술버릇이 있었다.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술을 계속 마시고 옆에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반복됐다. 괴롭힐 상대가 없으면 그 상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빠는 그 새벽에 초등학생인 누나와 나를 이끌고 엄마가 일하는 24시 해장국집으로 데려갔다. 우리 둘을 앉혀 놓고 거기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젊고 여린 엄마는 얼마나 불안하고, 아이들이 불쌍했을꼬. 엄마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엄마와 함께 일하는 아줌마들도 우리를 불쌍하게 쳐다봤다. 무슨 이런 삶이 다 있었을까.
해장국집은 너무 바빠서 엄마는 우리들을 돌볼 수 조차 없었다. 아줌마들은 지나가면서 작은 냉동고에 있는 붕어싸만코를 주었다. 갈 때마다 항상 붕어싸만코를 주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붕어싸만코를 먹지 않는다.
아빠가 해장국집을 자주 쫓아가다 보니 이상한 망상이 시작됐다. 해장국집 사장 아저씨랑 엄마가 바람났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머릿속에 온통 그런 생각만 있었나 보다.
그리고 며칠 뒤 사건이 터진 것이다. 아빠가 엄마를 엄청 때렸다. 너무 심하게.
세탁소 문간방은 방이 2개였다. 1개는 안방, 1개는 누나와 내가 쓰는 작은방. 아빠는 그날도 술을 마셨고, 엄마가 일을 못 나가게 막아섰다. 그리고 또 괴롭히기 시작했다. 괴롭히다가 술기운도 더 올라오고 의처증이 시작되어 남자 문제로도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당연히 엄마는 바람피우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빠는 본인의 망상만 말하다가 본인의 말에 더욱 화가 나서는 엄마를 쥐 잡듯이 팼다.
엄마의 옷도 홀라당 다 벗기고, 아빠 본인도 옷을 다 벗고 때렸다. 왜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우월감을 표출하고 싶었던 것일까. 굴복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엄마가 죽을까 봐 누나와 내가 안방으로 가서 말리려고 하면, 아빠는 우리에게 죽일 듯이 눈을 부릅뜨며, "가까이 오면 너희도 맞는다."라고 말했다.
엄마는 맞으면서도 우리도 맞을까 봐 아빠를 끌고 안방으로 다시 데려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그럴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안방으로 다시 데려가면 본인이 얻어맞는데, 다시 데려가는 상황이 아이러니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자잘한 폭행이 2시간 동안 이어졌을 것이다. 한참 후에 새벽 12시를 알리는 궤종시계가 울렸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
엄마의 비명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찢어질듯한 비명소리가 난 이후에는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숨소리만 들렸다. 정말 아픈 것 같았다. 내가 용기를 내었다.
안방으로 뛰어가서 쓰러져 누워 있는 엄마의 앞을 막아섰다. 막 뛰어 들어가던 찰나의 순간이 기억난다. 엄마는 엎어져 있었고 아빠는 엄마의 허리를 걷어 차고 있었다.
엄마의 입술은 터져서 바닥에 피가 흐르고 있었고 머리카락도 여기저기 비산돼 있었다. 내가 봤던 첫 선홍빛의 혈흔이었다. 허리가 아픈 지 엄마는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내가 엄마의 발끝까지 온몸을 막아보려 했다.
아빠는 흥분한 상태로 엄마와 나의 뺨을 동시에 때렸다. 엄마의 얼굴은 바로 내 뒤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둘 다 맞았다. 그 얼얼한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정말 날카롭고 아팠다.
"아빠... 왜 때려" 나는 이 정도의 말만 뱉었던 것 같다.
"엄마 도망가!" 그리고 누나와 난 소리쳤다. 엄마는 문간방 뒷문으로 옷을 다 벗은 채로 달려 나갔다. 아빠가 따라나서려 했지만 누나와 내가 발을 붙잡고 매달렸다. 다행이다. 엄마는 도망갔다.
아빠는 다시 옷을 입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누나와 난 작은방에 숨어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세탁소 건물은 4층짜리였다. 4층에는 주인댁이 살았는데 자주 오가면서 주인 할아버지가 우리 남매에게 잘해주셨다. 우리 집에서 가정폭력이 일어나는 것도 다 알고 계셨다.
그래서 누나와 나는 4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려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엄마가 분명히 여기로 왔을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다시 작은방으로 돌아와 가만히 앉아 있었다. 1시간이 좀 지났을까. 외삼촌이 집으로 왔다.
외삼촌은 분노를 참으면서 누나와 나, 우리 둘을 데리고 나갔다. 아빠를 외면하고 갔다. 아빠가 말이라도 거는 순간 패 죽일 듯한 분노였다. 그걸 아는지 아빠도 짐짓 삼촌한테 말을 걸지 않았다.
건물 뒤편으로 가서 삼촌의 엘란트라 차량에 탑승하니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4층에 숨어있었다. 할아버지가 지켜주셨다. 할아버지 내외가 빌려준 옷을 입고 삼촌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때도 112 신고 따위는 없었다. 엄마는 본인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우리부터 걱정했다.
"엄마... 괜찮아... 걱정 마..." 그 힘없는 목소리와 눈빛이 선하다.
그렇게 집 근처 병원 응급실에 갔다. 그리고 중간의 기억이 끊겼다.
다시 기억이 나는 것은 우리 집 안방에 엄마의 형제들과 외할아버지가 모두 앉아 있고, 아빠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사건으로 엄마와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협의이혼을 하였다. 엄마는 갈비뼈가 부러질 정도로 얻어맞았음에도 아빠는 처벌받지도 않았다. 그 시절은 그랬다.
그렇게 엄마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 외할아버지 댁으로 갔고 통원치료를 했다. 그렇다고 이야기만 들었다. 그 사건 이후로 엄마를 보지 못했다.
아빠는 엄마가 집 근처 병원에 통원한다는 것을 알고, 며칠 씩 그 앞에 가서 기다렸다. 마주치고 싶어서. 그때까지 누나와 난 제대로 끼니도 먹지 못했고, 초등학교도 빠지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선생님이 집에 전화를 했었고, 내가 받았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은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는지 물었고, 나는 엄마가 아빠한테 많이 맞아서 병원에 입원했고 아빠가 학교를 보내지 않아서 학교를 못 가고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엄마가 말하길 그 선생님에게 촌지도 준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따위가 선생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을까.
아무튼, 아빠가 며칠 씩 병원 앞에서 기다리다가 엄마를 만났고 내가 집에 있을 때 엄마를 데리고 왔다. 난 그때 실로폰을 배워서 열심히 치고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엄마가 너무 반가웠다. 그래서 엄마에게 열심히 실로폰을 쳐서 자랑했다. 그게 기억의 끝이다.
엄마와 아빠는 다시 재혼을 했다. 서류상으로. 그리고 다시 살았다. 그날 이후 외가와 연이 끊겼다. 외가는 결혼 전부터 아빠를 싫어했었고, 이번 폭력사건이 터졌을 때 오냐 잘됐다 하면서 이혼을 시켰을 텐데 엄마가 나와 누나 때문에 집으로 다시 돌아가자 연을 끊어 버린 것이다. 엄마 앞에서 실로폰을 치지 말았을 것을... 나는 가끔 후회했다.
난 아직도 외가를 원망한다. 본인들 입맛에 맞지 않다고 조카들, 손주들까지 버리다니. 어른이 된 지금은 경조사가 있을 때 한 번씩 왕래를 하고 있긴 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의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잘 살아서 복수하고 싶었고, 지금은 잘 복수하고 있다.
엄마는 그때 엄청 두드려 맞아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입술도 터졌다. 그럼에도 30년은 더 아빠와 같이 살면서 계속 가정폭력에 노출되며 살았다. 가스라이팅도 무서운 것이다. 아빠는 심심하면 위협적인 말을 달고 살았다.
"담가 분다." "패 죽여분다."
칼도 심심찮게 들었다. 그래서 엄마는 집에 있는 칼을 항상 숨겨놓고 살았다. 그럼에도 아빠가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았다. 이혼도 시도해 보았지만 엄마는 스스로 포기하고 살았다. 그냥 아빠가 죽을 때까지 참아 보자고.
고삐 풀린 폭력에 4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았다. 엄마는 20살에 결혼해서 환갑이 조금 넘어서야 자유를 얻었다. 지금은 혼자 아파트를 얻어서 잘 살고 계신다. 가끔 생채기가 남아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래도 아빠가 없는 세상이 너무 행복하다. 그립지도 않다.
죽는 순간에도 나와 누나, 엄마에겐 사과하지 않았다. 입관할 때도 원망의 마음만 들었다. 끝까지 그 40년의 세월을 보상받지 못한 기분이었다. 누나와 난 성질이 난 눈빛이었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엄마는 그럼에도 함께 살았던 남편이 불쌍했던 것인지 눈물을 흘리며 고통 없는 곳으로 가라며 배웅해 주었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다. 엄마는 대체 어떤 감정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