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언자 Oct 12. 2016

내가 글쓰는 이유

<에세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잘 알려져서 그런지 이젠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식상한 어구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시금 제가 알고 있는 언어의 구슬들을 매만져가며 표현해보니 “세계 너머의 것을 보는 능력”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릴 적부터 막연히 이 세계 너머의 것을 보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관찰 · 통찰 · 독해 · 관조 · 궁리라는 언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 ‘창발적인 능력’을 기르고 싶었습니다. 복잡하게 뭐라, 뭐라 해도 결국 ‘세계를 읽어내는 눈’이더군요. 사실 오늘도 엄청나게 많은 ‘텍스트’를 우리는 읽었습니다. ‘자연’이라는 텍스트를, ‘사람’이라는 텍스트를, ‘활자로 표현된’ 텍스트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의 기억 속에 오롯이 자리 잡아, 우리에게 울림을 줘서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텍스트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런걸까요?


   저는 ‘읽어낼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공부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운행원리를 깨닫는 것’인데, 사람을 읽어내고, 세계의 이치를 포획해낼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탓이겠죠. 그래서 저는 ‘읽어내는 것’에 유난한 공을 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잘 읽고자 하는 자, 잘 쓰게 될 것이며, 잘 쓰고자 하는자, 잘 읽게 될 것’이라는 평범한 이치를 깨닫는 순간이었죠. 그때부터 글 쓰는 것에 대한 관심과 집착이 생겼습니다. 숱하게 많았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백일장 대회에서 그 흔한 ‘장려상’에조차 입상하지 못했던 제가 변한 것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외려 제 자신이 기특해지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사물’ 너머의 것을 읽어내기 위해,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돌보고 공감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공부는 ‘읽기’와 ‘쓰기’라는 두 날개로 힘차게 도약합니다. 

그리고 저는 힘껏 도약한 공부라는 비행기에 올라타 광활한 세계를 마음껏 바라보며 제가 감히 품을 수 없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치열하게 글을 읽고, 쓰면서 얻은 작은 통찰들을 나누는 삶을 말이지요. 그리고 저의 글이 다른 이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줘서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사람 사는 세상’답게 살아 갈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키는 작은 움직임에 그들이 동참하게 하는 것 말입니다. 『동물농장』의 뒤편에 짧게 수록된 「나는 왜 쓰는가」에 나와 있는 조지 오웰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사람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말의 배열을 담은 ‘미학적 열정’과 사람을 설득하는 글쓰기 곧 ‘정치적인 글쓰기’가 바로 저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지오웰

   결코 정복할 수 없는 능력이라 할지라도 부단히 노력하여 사람과 세계를 잘 읽어내고 싶습니다. 시인의 마음으로 보잘 것 없는 들꽃 앞에 멈춰 서서, 시인의 눈으로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본 것, 제가 읽어낸 ‘세계 너머의 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습니다. 모든 이들의 마음에 있는 ‘더 좋은 세상을 향한 기대감’이 보다 더 크게 울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울림이 더욱 공명할 수 있게 하는 글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것입니다. 논리 정연함과 정제된 개념들을 글에서 배제할 수 없겠지만, 그것보다 아름답게 다른 이의 내면에 스며드는 유려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물은 결국엔, 어떻게든 바위를 뚫어내기에 그렇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왜 머뭇거리는가, 제도권을 향해 투신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