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정치참여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단상
글을 시작하기 전에 ‘공공성’을 사전에서 찾아봤다. 공공성이란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이라고 한다. 단어에 대한 설명이 퍽 맘에 들었다. 필자가 살아가는 인생관에도 부합한다. 필자는 한 개인이나 단체에만 관련된 사람이고 싶지 않다. 필자는 되도록 사회 구성원 전체와 관련있는 일에 자신을 투신하고 싶다. “나를 던진다”는 표현은 그런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설명구가 아닐까? 그래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말할 때(특히 필자의 종교 기독교와 정치의 관계를 논할 때), 종교의 공공성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아예 없애려는 사람을 만나면 조금 불편하다. 종교는 공공성을 전제로 한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종교는 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서 존재하는 도구가 아니다. 종교를 개인 영성 추구의 장(場)으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맑스의 비판에 딱 들어맞는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으로 존재해선 안된다. 종교는 현 사회의 공공성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며, 종교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닌 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가치’를 위해 나설 수 있어야 한다.
현 사회는 고도로 다원화된 사회이다. 각 학문간의 높아진 경계를 낮추는 움짐임이 뚜렷하며, 종교 간의 대화도 활발하다. 이는 예견된 흐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불렀다. 구성원의 엇갈린 이해들을 ‘무력’이나 ‘폭력’이 아닌 ‘대화’와 ‘토론’을 통해 더 나은 대안과 방법을 모색하므로, 서로의 이견(異見)을 존중하고 들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셀 수 없이 다양한 집단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여기저기서 각자의 목소리를 높이고 이야기 한다. 시끄럽다. 그렇다 이 ‘시끄러움’이 민주주의의 요체이다. 무질서한거 같으나, 사회의 공적이익을 위해 대화와 토론으로 차선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바로 민주주의인 것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서로 다른 집단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자신들의 의견을 이 사회에 관철시키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집단들은 이 경쟁에서 소외되기 쉽다. ‘다수결’이라는 경쟁은 필연적으로 소수표를 만들어낸다.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과서의 이상이지 현실은 다르다. 줄곧 소수자들은, 소수의 목소리는 대부분 무시되거나 소외 되었다. 필자는 종교가 바로 이 ‘다수결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주류를 거부하고 비주류에 스스로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다수결의 경쟁’에서 도태되거나 밀릴 수 있는 한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알릴 수 있어야 한다. 이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종교의 성격이 공공성을 띌 수 밖에 없다. 곧, 제도권 안으로 뛰어들 수 밖에 없다.
필자가 믿는 기독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복음’도 이러한 공공성을 내포한다. 복음은 현 한국교회가 이해하는 대로 ‘개인의 구원’에만 국한된 좁은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복음은 이 땅을 향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사회에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통치’란 무엇인가? 개인이 구원받고 천국가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인가? 아니다. 그러한 수준의 이해는 하나님의 통치를 오롯이 담아내기에 너무 비좁다. 하나님의 통치는 성경이 구약을 통해 줄곧 외친 ‘정의와 공의가 가득한 나라’이다. 여기선 굳이 성경이 말하는 ‘정의와 공의’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구약에서 많은 선지자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의 입을 통해 주야장천(晝夜長天) 외친 정의와 공의는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시편72:4)”,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그들의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원하는 것(시편72:12-14)”이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 정도만 언급해도 충분하리라. 기독교의 복음은 공적이다. 이 땅이 정의와 공의가 가득한 나라가 되기 위해선 기독교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 밖에 없다. 혹자는 기독교 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며, 바른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한 시민을 양성하는 것, 그리고 정치적 입장은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한국교회는 그동안 정치적 입장에서 중립적 태도를 유지해왔으며, 앞으로도 교회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그동안 정치적으로 결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도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채 매우 정치적인 발언을 강단에서 서슴지 않고 선포하고 있으며, 몇몇 집단은 보다 정치적인 힘을 얻기 위해 제도권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누가 이것을 부인하겠는가. 굳이 멀리가서 독재정권에 협조하는 조찬기도회를 열었다거나, 군목제도를 굳건히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사학법 반대를 위해 많은 목사들이 광장에서 삭발투쟁을 하고, 북한에 친화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정부에 대해 악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얼마전 치뤘던 4월 총선에서 일명 ‘기독당’ 4%의 득표율을 아쉽게(?) 얻지 못해 가까스로 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최근에 목격하여 잘 알지 않는가? 이렇듯 한국교회는 그동안 정치권과(특히 보수 정치권)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했으며 매우 정치적인 태도를 일관성 있게 보여줬다.
그러면서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입장 표명을 ‘교회의 정치적 입장 표명’이라 칭하며 ‘교회는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태도들은 일관성 없는 행태이며 난센스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제도화된 한국교회는 앞으로도 그동안 보여준 정치적 행보를 멈추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정치적인 입장을 표명하는 것에 대해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이유가 있을까 의문이다. 오히려 복음의 공공성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뜻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저들의 폭주에 대항하여 대척점에 서있어야 하지 않을까? 보다 적극적으로 제도권을 향하여(또는 제도권으로 뛰어들어)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아니, 이미 그런 사회가 되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돈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쓰라린 모습들을 곳곳에서 우린 목격한다. 사람의 생명과 가치를 근본으로 여기는 ‘인본주의’는 이 사회에서 빛을 잃은 것일까? 돈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자본주의’는 이제 ‘신자유주의’라는 악랄한 가면을 쓴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의 뚜렷한 경계들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사람의 생명도, 인간의 가치도, 존엄도 모두 자본 앞에선 나약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두가 경제적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려 할 때, ‘여기에 사람이 있다’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이 사회를 향해 강변하며, 거꾸로 된 사람과 돈의 가치를 역전 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종교가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참된 종교는 돈과 이익을 따르지 아니한다고 생각한다. 참된 종교는 무엇보다 사람을 귀히 여기며, 사람이 대상화 되어 사회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때, 광장에 나가 존재의 가치를 인간의 존엄을 고래고래 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금의 사회에서 종교는 제도권을 향해 돌진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정치적이어야 한다. 잊혀져 가는 ‘가치’를 살리고 실현시키기 위해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