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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언자 Oct 24. 2018

팩트(fact)를 이야기로 직조하는 세상

[그 쇳물 쓰지 마라](제페토) 서평

팩트가 세상을 침식하니 이야기가 머물기 엔 세상이 너무 좁다랗다. ‘팩트체크’, ‘팩트폭행’ …등 이미 팩트는 이물감 없이 우리네 언어에 녹아들었고, ‘팩트’라는 언어는 외국어가 아닌 외래어의 자리에 올랐다. 대중은 팩트를 요구한다. 팩트를 찾는다. “구하라 그리하면 찾을것이라”더니 이게 웬 일인가. 팩트의 홍수다. 팩트를 구할수록 진실과 멀어지는 이 아이러니를 어쩌란 말인가.

각 언론사마다 '팩트체트'가 화두인지는 오래다. 가짜뉴스의 실체가 폭로되면서 분노한 대중들은 더 팩트체크에 열을 올린다.

   사람은 본디 이야기함으로 사람이 되어간다. 마이클 그랜디지 감독의 영화 지니어스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다. “맥스, 그 옛날 선사시대에, 우리의 선조들이 어두운 밤 동굴에서 맹수들의 울음소리에 견딜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줄 알아요? 바로 ‘이야기’에요. 우리의 선조들은 긴 밤의 칠흑 같은 어둠에 ‘이야기’를 통해 맞섰어요. 라스코 동굴의 벽화가 이를 증명해주죠. 이야기는 이렇게 힘이 있어요!” 탁월한 작가들은 이야기의 힘을 안다. 이야기를 요구하고, 찾는다. 팩트가 아닌 이야기를 통해 진실에 다가서려 한다.

영화 <지니어스> 포스터

   제페토의 [그 쇳물 쓰지 마라]는 기존의 에세이집, 시집에서 볼 수 없던 형식의 시집이다. 시인의 시가 등장하기 이전에 팩트를 다룬 기사가 먼저 나온다. 알고 보니 2010년부터 꾸준히 7년간 인터넷 뉴스에 시로 댓글을 다는 ‘댓글시인’이라는 것. 시인이면 시인이지 ‘댓글시인’이라니, 글쓴이의 겸양된 소개도 인상적이지만 진정 인상 깊었던 것은 ‘팩트를 이야기로 직조하는’ 글쓴이의 감성이었다. 우리에겐 팩트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을 건물 외벽 유리창을 청소하던 40대 김모씨가 글쓴이에게는 “이름 모를 친구”(37)가 되며, 영하 10도의 한파 속에서 폐지를 수집하던 노인의 쓸쓸한 뒷모습은 “생을 마친 종이를 부활의 초입까지 나르는”(27) 뒷모습이 된다. 책 내용을 잠깐 소개하자면 이렇다. 책 제목으로 인용된 시이기도 하다.


당진서 20대 철강업체 직원 용광로에 빠져 숨져

7일 새벽 2시께 충남 당진군 석문면 한 철광업체에서 이 회사 노동자 김모(29)씨가 작업 도중 5m 높이의 용광로 속에 빠져 숨졌다. (중략) 용광로에는 섭씨 1,600도가 넘는 쇳물이 담겨 있어 김씨의 시신을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염狂焰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찾아와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 하게.


<그 쇳물 쓰지 마라>


   누군가의 아비였고, 누군가의 어미였으며 또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었을 ‘김모씨’, ‘최모씨’를 무미건조한 팩트의 토양에서 구원해내는 건 글쓴이의 시이고, 이야기다. 지구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를 우리는 통계의 수치로, 팩트의 한 조각으로 만날 뿐이지만, 그는 다르다. 이야기의 아니리에 시로 창唱을 하니, 그 절경에 함께 공감하지 않을 자 누구랴. 팩트의 광풍 속에서 아스라이 멀어졌던 사람의 광휘를 한 자락 본다.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정리하던 글쓴이는 말한다. “지금은 비록 아프고 쓸쓸한 댓글이 8할쯤 되지만, 오래지 않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오면 사회면 뉴스를 떠나 조금은 나른하고 사소한 것들에 관하여 쓸 수 있을 게다.” 글쓴이의 소망과 바람에 기도를 보태고자 한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다 1, 2부는 뉴스 기사에 댓글을 달았던 것을 모아둔 것이고, 3부는 저자 개인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추린 것이다. 책에 파묻혀 죽기 좋은 시대에 반가운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책은 얇지만, 사람은 가득하고, 책은 가볍지만, 공감의 온정으로 무겁다. 사람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한다면 이 책이 제격이다. 모든 문학이 그러하니 뻔한 말을 늘어놓는 게지만, 글쓴이의 시는 ‘사람에 달린 댓글’이다. 몸 글만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편견을 깨트린 책, 댓글을 다는 사람 또한 저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보여준 책이다. 좋다. 팩트의 나열을 박차고 나오고 싶은 사람, 이야기와 시 언어의 힘으로 ‘긴 밤 칠흑 같은 어두움’을 견디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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