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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언자 Apr 28. 2016

"무신론자를 위한 쿡방"

<서평>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 드 보통,

새로운 레시피(recipe)

여기 새로운 쿡방(‘쿡방’이란 요리하다의 ‘Cook’과 ‘방송’이 합성한 신조어다. 단순하게 맛있게 먹기만 하는 ‘먹방’에서 벗어나 출연진들이 직접 요리하고 맛을 본다. 쿡방의 하이라이트는 보화와 같은 레시피 공개이다.)이 시작한다. 이 쿡방의 진행자와 셰프를 맡은 알랭 드 보통은 기존의 쿡방과 다른 차원의 쿡방을 보여준다. 그는 그동안 둘로 나뉜 ‘종교 쿡방’과 ‘세속 쿡방’을 넘나드는 기재(機才)를 보여준다. 그동안 ‘세속 쿡방’의 무신론자 셰프들이 무시하고 쳐다보지도 않았던(아니, 어쩌면 금기시되었던) 음식 재료, ‘종교’를 보통은 과감하게 사용하자고 한다. 그는 더 다채롭고 풍요로운 맛을 위해 편협한 ‘무신론 레시피’를 과감히 버린다. ‘맛있으면 그만 아닌가.’ ‘좋으면 된 거 아닌가.’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모든 종교의 재료를 레시피에 넣겠다는 것이 아니다. 종교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에겐) 치명적인 독소라 할 수 있는 ‘교리’를 제거하고 사용한다. 드 보통은 말한다 : 이제 새롭게 선보일 이 ‘쿡방’은 그동안 무신론자들이 외면한 풍부한 종교의 식재료들, 특히 “공동체의 도전과 관련된, 그리고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고통의 도전과 관련된 통찰”을 가져다 줄 식재료들로 만들어내는 매력적인 음식들의 향연이 될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그 은식과 재료는 공동체, 친절, 교육, 자애, 비관주의, 관점, 미술, 건출, 제도이다. 자, 이제 그의 섬세한 손을 통해 공개되는 새로운 레시피를 주목하시라.


첫 번째 레시피: 공동체

   드 보통이 처음으로 선 보이는 음식은 ‘공동체’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가치는 바로 공동체다. 여기서 드 보통이 회복하고자 하는 공동체 속의 개인은 수많은 군중 속의 고독한 ‘나’가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 깊은 연대감을 느끼는 ‘나’이다. 이 공동체는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일터에서의 성취”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사랑과 자비를 통해 한 개인이 존중받는 곳이다. 드 보통은 가톨릭에서 미사라는 재료를 가져온다. 미사는 공동체라는 훌륭한 음식의 맛을 유지하게 하는 좋은 재료이다. 미사를 통해 그동안 우리가 집착하던 세속의 성공은 중요성을 잃게 되고. 우리에게 주입된 세속의 두려움(실패할 경우 외면받을 것 같은 두려움)은 사라진다. 이제는 세속의 성공이 아니라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미사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존경 그리고 안정감이 우리를 만족하게 한다. 더 나아가 미사는 다양하고 자세한 규범을 제시하고 사람들은 그 규범을 그대로 준수한다. 잘 짜인 규범은 공동체를 잘 유치하는 또 하나의 비결이다.


   공동체라는 음식을 만드는 또 하나의 비결은 식탁 교제이다. 인간은 배가 부르고 만족감을 느낄 때 타자를 향한 관심이 생겨,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기독교는 이점을 분명히 알았다. 따라서 “아가페 잔치”를 벌였으며, 이를 통해 식탁 공동체는 그 끈끈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드 보통은 이 유용한 재료도 기꺼이 사용한다. 바로 “아가페 식당”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익명성과 냉담함을 내세우는 현대 식당의 모습을 버리고, 서로가 의미 있는 접촉을 할 수 있어 공동체의 화목을 꾀하는 식당이 바로 “아가페 식당”의 모습이다. 그 식당의 구체적인 모습은 이럴 것이다 : “항상 문이 열려 있을 것이고,…좌석 배치의 경우, 우리가 흔히 안주하던 각자의 집단이나 인종 같은 기준을 깨트리게 될 것이다.…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단순한 미덕 하나만으로, 손님들은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공동체와 우정의 정신에 대한 저마다의 충성을 표현할 것이다.” 식사 시간은 세속의 성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진솔한 모습을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는 시간이 될 것이다.


두 번째 레시피: 친절

   그다음으로 드 보통은 ‘친절’이란 요리로 눈을 돌린다. 남들에게 간섭을 전혀 받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만을 강조하는 팍팍한 현대 사회에서 ‘친절’한 안내자는 참 매력적이다. 진정한 자유는 아무 규제와 제한이 없는 방종을 말하지 않는다. 드 보통은 ‘진정한 자유란 친절한 규제와 인도를 전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는 이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인간이 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관중이 필요하며, 신의 감시와 율법의 규제는 인간에게 오히려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드 보통의 맛깔나는 요리의 두 번째 레시피는 차가운 자유지상주의 보다는 따뜻한 온정주의를 재료로 삼는다.

   드 보통이 기독교에서 느끼는 매력인 친절함은 기독교의 인간 이해에서 비롯된다. 기독교는 인간이 아동기를 지나 성인기가 되어도 지속적으로 친절하게 규율과 안내를 제공한다. 아동기나 성인기나 인간은 별반 다를 바 없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를 매우 잘 드러내는 예가 ‘조토의 프레스코 화’이다. 조토는 성당의 벽을 14개의 서로 다른 미덕이나 악덕을 보여주는 그림들로 채웠다. 이는 “신중”, “용기”, “절제”, “정의”와 “신앙”, “자비” 그리고 “우둔”, “변덕”, “분노”등이다. 성도는 이 그림에 둘러싸여 ‘도덕적인 분위기’ 속에서 교회가 제시하는 교훈을 생각하고 배운다. 현대 사회에서 광고가 하는 일이 바로 이것 아닌가? ‘선전(프로파간다)’의 역할 말이다. 선전 자체를 너무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드 보통은 광고에서 세속적인 물품만 다룰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미덕도 다룰 것(지속적으로 선전할 것)을 제안한다.


세 번째 레시피: 교육

   19세기 유럽에서 종교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약화되면서 그동안 종교가 담당하던 도덕 교육, 인간 의미에 대한 성찰, 타자를 용서하기 등을 어떤 것이 대신할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고민했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문화’라고 답했다. 문화가 교육의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가 성서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성서를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은 대학에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대학은 인간에게 도덕적 가치를 전달하고 교육하려 하지 않았다. 대학은 기술을 가르치고 정보를 전달하려 할 뿐이었다. 드 보통은 말한다. 종교는 인간을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로 보기에 도덕적 가치를 교육하고 가르치려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 번째 레시피의 내용은 종교의 교육과 관련 있다.

   설교와 강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강의는 정보를 전달하려 한다. 전달한 정보들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바꾸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종교에서 설교는 다르다. 설교는 사람을 바꾸는 것에, 변화시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선을 추구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청중들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청중들은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며 반응을 보인다. 세속 강의에선 그렇지 않다. 플라톤을 가르친다고 해서,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고 배운다고 해서, 릴케의 시를 낭독한다고 해서 청중들은 아멘! 아멘! 을 외치지 않는다. 삶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는 종교의 교육을 드 보통은 대학도 따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반복이 필요하다. 종교는 새로운 것을 계속하여 전달하는 것보다는, 익히 들었던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을 계속 반복한다. 반복된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믿음이 종교엔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는 날짜에 따라 습득된 교훈을 계속 상기시킬 수 있도록 기념일을 제정한다. 교회에서 제정한 다양한 기념일에 거행하는 다양한 예식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가르침을 교회는 몸(육체)과 통합시킨다. 이는 삶의 실천을 담보하는 가르침을 추구한 결과이다.

   드 보통은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자세하게 살핀다. 존 스튜어트 밀이 “대학의 목적은 능력 있고 교양 있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부르짖은 것처럼, 교양 있는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좋은 교육의 메커니즘이 종교엔 풍부하다. 종교에서 다채롭고 매력적인 교육의 재료를 가져와 세속적인 사회에서 사용하길 주저할 필요는 없다.


네 번째 레시피: 자애

   이번 쿡방은 세속의 사회에서 많은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드 보통의 특별한 레시피가 공개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한 적이 있는가? 석양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곤궁함을 느낀다. 그러나 드 보통이 지적하듯이, 효율성과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현대인은 곤궁함을 너무 조급하게 대처하려 한다. 여기서 기독교의 성모를 생각해보자. 이 유용한 재료를 그동안 세속주의자들이 무시하고 살아왔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드 보통에게 성모의 실재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성모의 역할이 중요할 뿐이다. 어떠한 필요에 의해 성모 숭배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어른이 슬프고 괴로워서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아줬으면 하는 기초적인 갈망은 세속사회에선 유치하게 치부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성모 숭배 신앙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성모님의 말씀, “슬퍼하지 말라. 내가 여기 있잖니”)를 합법화했다. 인간은 유년기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유년기를 거쳐 어른이 된다. 종교는 이것을 분명히 인지했고, 성스러운 존재가 당신을 보살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슬퍼하는 세속인들이여 여기 드 보통이 제안하는 레시피를 주목하라. 당신들은 그저 이 유용한 재료를 세속사회의 상황에 맞게 변형시키고, 상상하면 그만이다.


다섯 번째 레시피: 비관주의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아는 데에서 시작된다.” 파스칼의 말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 말은 별로 적절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현대의 세속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바로 ‘낙관주의’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 그리고 상업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물질적 진보를 가져다주었고, 삶의 안정과 풍요로움을 선물했다. 자, 그러면 하나만 묻겠다. ‘우리는 행복한가?’ 이 물음 앞에 즉각적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 나 행복하다!’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현대인은 얼마나 있을까? 그렇다. 우린 여전히 많은 사건과 사고에 둘러싸여 있고, 여전히 좌절하고, 여전히 질투하고 불안해한다. 중세 시대와 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중세의 그들은 비관주의를 해소할 수 있는 레시피를 소유했다는 점 아닐까? 드 보통은 비관주의에 빠진 세속인들을 향한 레시피를 제시한다.


   드 보통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내세라는 안전장치를 통해 희망을 삶의 자리에서 먼 곳으로 옮겨 놓았다. 따라서 현실에서 좌절과 절망을 겪어도 그들이 냉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결코 세속 세계에 대해 낙관적인 관점을 취하지 않았다. 어쩌면 세속인들보다 더 균형 잡힌 시각, 온당한 관점을 유지했는지 모른다. 드 보통이 보기에 낙원, 내세라는 재료는 참 매력적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내세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관점과 태도를 빌리자는 것이다. 또한 그는 신이 늘 도와줄 가능성을 믿는 종교의 태도에 주목한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에 많은 유대인들이 슬픔을 안고 도움을 구했던 것처럼, 세속인들에게도 그러한 장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대인을 위한 통곡의 벽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드 보통이 제안하듯, “재난은 어디에나 있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다시 심어주고”, 진보에 대한 순진한 낙관주의를 고치는 역할을 할 것이다. 통곡의 벽 전광판, 매력적이지 않은가?


여섯 번째 레시피: 관점

   쏟아질 것만 같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경외감에 빠진 적이 있는가? 경이로운 자연 앞에 홀로 선 나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고, 나의 생각과 판단이 최고인 줄만 알았던 오만이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한 적 있냔 말이다. 드 보통은 성경의 욥기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통해 또 하나의 귀중한 재료, ‘관점의 이동’을 종교에서 빌려온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들에만 매몰되기 쉬운 존재다. 인간의 사고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재난과 고통의 문제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우리들을 내몬다. 바로 그때, 종교는 인간의 시선을 ‘영원’을 향하게 한다. 무한자의 시각에서 인간사를 바라보기를 권유한다. 스피노자는 이를 세속의 언어로 잘 풀어낸 사상가이다. “영원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 상상하는 것은 스피노자가 좌절에 빠진 인간에게 권유하는 조언이다. 여기서 “영원”이란 개념은 신적인 존재보다는 우주의 광활함 정도로 이해하는 게 좋다. 별에 대한 연구는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이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 “구제의 경외감”에 빠지게 한다. 드 보통의 레시피에 따르면, 과학은 이제 단순히 천문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천문학이 인간 지혜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고통의 훌륭한 대응책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곱 번째 관점: 미술

   종교의 미술은 세속인도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재료이다. 드 보통은 종교의 미술로 현대인이 만족할 만한 맛 좋은 음식을 만든다. 우리가 미술을 흔히 접할 수 있는 박물관에선 그동안 미술품의 정보를 제공해 주는 정도에서 그쳤다. 사람들은 난해한 작품 앞에서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로 감동 없이, 교훈 없이 그저 서있을 뿐이었다. 드 보통은 여기에서 종교가 미술을 다루는 방식을 주목한다. 종교는 미술을 교훈을 주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종교인들은 은으로 된 “성모와 성자상”을 보며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보며 “무엇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고 깨닫게 된다. 드 보통은 종교가 미술을 프로파간다로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현대의 미술 또한 그러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을 주문한다. 현대의 박물관은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감정과 의식을 관람객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가 상상하고 제안하는 박물관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단순히 학문적 분류에 따라 작품들을 분류한 것이 아니라, 작품의 테마와 목적이 우리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구상된 박물관, 인간의 심리를 건드리며, 인간의 고귀한 가치, 곧 동정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박물관에선 무신론자들도, 마치 종교인들이 예수의 십자가상을 바라보며 느꼈던 경외감, 자비,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미술 작품을 통해 흘러오는 인류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덟 번째 관점: 건축

   본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줄지어 늘어선 회색빛의 건물들, 빽빽하게 줄지어서 연신 경적을 울려대는 자동차들, 요란한 네온사인의 빛을 뿜어대는 전광판들이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참아낸다. 이전에도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러겠거니 잘 참아낸다. 그러나 가톨릭의 전통에 따르면 대성당의 아름다운 조각상과 그림들은 “사람들에게 신앙의 세부사항을 기억하고 계속해서 상기시키는 관슴을 가르치고 습득시키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한다. 그러니까 “성스러운 건축”이 진리를 계속 되뇌게 하며,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드 보통은 종교가 주목한 “건축의 중요성”에서 자신만의 레시피를 위한 재료를 차용한다.

   인간은 눈길이 머무른 모든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철학자 플로티노스의 말처럼 건물에 대해서도 우리는 ‘잔인하다, 냉소적이다, 자기만족적이다’등의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황폐한 도시의 풍경은 인간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러한 전제하에 드 보통은 자신만의 레시피로 세속사회를 위한 신전을 제안한다. 여기서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종교 건축의 배후에 있는 목적을 우리가 부활시키고 지속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감정과 추상적 테마를 위해 고안된 신전을 만들고, 그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레시피: 제도

   화룡점정(畫龍點睛)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까? 드 보통은 자신의 쿡방에서 소개한 매력적인 재료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한다. 그 비결은 바로 제도화이다. 책도 분명히 전달력과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종교에서 사용한 제도만큼은 아니다. 제도는 많은 생각의 나열을 줄여주고, 기억의 속도를 늦춘다. 제도는 힘이 있다. 그래서 오귀스트 콩트는 자신만의 제도로 ‘인류의 종교’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세속사회에도 나름의 제도가 필요하다. 종교를 대신하여 인간의 필요와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알랭 드 보통의 쿡방을 종영하며

   예민한 사람은 벌써 눈치를 챘는지 모른다. 드 보통의 쿡방은 종교에 귀의하지 않고, 세속사회를 살아가길 바라는, ‘무신론자들을 위한 쿡방’이다. 종교인들이 시청하면 불경건하다고 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극단적 무신론자들이 들으면 콧방귀 뀔 내용들도 많다. 그러나 드 보통이 주장하는 바는 쉽게 무시할 내용이 아니다. ‘무신론자라고 해서 종교를 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류의 유산이며, 귀중한 보화이다. 세속을 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맛보려는 사람은, 종교의 유용한 재료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현대인들이 갈구하는 맛, 원하는 맛은 사실 종교의 재료를 통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탁월한 셰프이자 종교와 무신론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이 발칙한 드 보통의 제안이 어쩌면 매력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종교에 대한 이해가 깊다. 보통 깊은 것이 아니다. 부끄러웠던 사실은 많은 기독교인들과 신자들은 드 보통이 무신론자들에게 제안하는 ‘교회의 소중한 유산’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순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이 해프닝으로 인해, 교회는 편협한 집단이 되었고, 교리와 교회의 이익만 따지는 근본주의적인 집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사랑을 얘기해야 하는 종교가 사회 곳곳에서 싸움과 다툼을 야기하고 있고, 관용과 배려보다는 타 종교를 향한 무분별한 적대심, 경쟁심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드 보통의 쿡방을 매력적이라 느끼고, 자꾸만 보게 되는 까닭은 교회가 사회를 향해 공동선을 제시하지 못하고, 집단의 이익만 추구하는 세속의 사회 집단과 동일한 모습으로 변한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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