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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언자 Nov 29. 2023

탐구를 넘어 변혁을 꿈꿔야 할 때

월터 윙크, 『성서는 변혁이다_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하여』서평

오늘날 교회들은 일종의 바빌론 포로 상태에 있다. 하지만 포로들은 여전히 자유를 갈망하며, 그들 중 다수는 여전히 성서가 그 자유를 향한 길을 밝혀줄 거라 믿고 있다. 물론 다른 상황에 놓인 이, 다른 공동체도 성서를 연구할 수 있으며, 읽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성서는 교회의 책이다. 성서와 교회는 함께 바빌론에 가고, 함께 그발 강가에서 시름에 잠기고, 함께 고향으로 돌아간다. (127)


신학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질문이 너무 거창하다 싶으니 범위를 줄여본다. 신학이 교회를 구원할 수 있을까? 네. 확신합니다!’ 나는 신학이 위기에 빠진 교회를 구원할 거라 확신했다. 신학에 입문해 받은 신학의 세례가 교회의 현장에서 성화되지 못하는 것이 한국교회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 생각했다. 신학의 세례를 받지 못한 교설들이 교회 강단을 어지럽게 하는 것을 목격할 때 나의 확신은 신앙이 되었다. ‘순진한 성도(?)’와 교회를 혹세무민하는 자들의 언설에 굴복하지 않고 깨어있어야 한다. 지금은 치열하게 계몽의 칼날을 날카롭게 할 때이다. 

   바빌론 포로 상태에 있는 교회를 해방시키기 위해 ‘최신 신학’으로 무장해야 한다. 성서(성’경’이 아니다)를 교리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성서는 수천 년의 ‘시간’ 그리고 한국과 동떨어진 ‘공간’에서 ‘인간에 의해’ 쓰여진 ‘텍스트’이다. 성서는 신앙의 체계를 말하는 교리의 언어로 쓰여지지 않았다. 시공간의 영향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맥락에서 ‘오랜 기간을 거쳐 형성된’ 일종의 ‘고전 텍스트’이다. 그러니 성서를 읽고 곧바로 ‘오늘 읽은 말씀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라고 섣부르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성서를 주관적으로 읽고, 적용하는 태도가 교회의 강단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거리두기’는 ‘비평’이다. 익숙함을 경계하고 실험실의 과학자처럼 개인의 주관을 배제한 엄격한 관찰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서설의 다이어그램_위키디피아


   ‘역사 비평’ historical-critical method은 성서를 관찰자의 자세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객관적 이성’이라는 엄정한 잣대로 ‘피고 성서’를 신문한다. 피고와 철저한 거리두기가 중요하다. 성서의 다양한 신화, 기적 설화, 문서 저자 등 모두 신문의 대상이다. 특히 성서의 ‘예수’라는 인물은 특검을 요한다. 그의 말과 가르침, 여러 기적을 일으켰다는 행적 모두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정말 예수가 그런 말을 했다고?’,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다고?’, ‘예수가 신적인 존재라고?’,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이성은 철저한 거리두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구형한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말로 기록된 것은 대부분 예수가 실제 한 말이 아니다. 또한 기적이나 부활 같은 초자연적 현상은 인정할 수 없다. 예수는 신적인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그는 비폭력 평화주의자,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의 해방자, 훌륭한 도덕 선생 등으로 볼 수 있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없다. 이걸로 끝이다. ‘역사 비평’을 통해 교리의 억압에 억눌린 성서를 해방시키고 나아가 신학의 세례로 바빌론 포로 상태에 있는 교회와 순진한 성도들을 해방시킬 거라고, 오만한 태도로 자신만만했던 나는 길을 잃고 말았다. ‘역사 비평’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위에 성서를 올려놓고 성서를 재단하며, 문자주의자나 근본주의자를 조롱하고 비판하던 나는 성서를 ‘왜 읽어야 하는지’ 방향조차 잡지 못했다. 바빌론 포로가 된 것은 나였다. 성서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서에 아무런 관심도, 질문도(이 모든 것들은 객관적인 태도에 방해가 되는 선입견이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다) 던지지 않았기에 성서는 침묵했던 것이다. 신학이 세상을, 아니 교회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지만 나조차 구원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월터 윙크, 『성서는 변혁이다_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하여』, (비아, 2023)


역사 비평은 파산했다

『성서는 변혁이다_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하여』의 첫 문장은 도발적인 그러나 충격적인 선언이다. 역사 비평은 파산했다. 말 그대로 ‘파산’했다.”(19) 파산한 회사는 ‘수익 창출’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태이므로 이전의 방식과 완전히 다른 혁신, 곧 ‘새로운 경영 방침’이 필요하다. ‘도산’이 아니다. ‘파산’이다. 역사 비평의 본연의 목적, 곧 “성서 해석을 통해 과거를 생생히 되살리고 우리에게 개인적, 사회적 변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20)을 달성할 수 없는 상태라는 뜻이다. ‘역사 비평’은 혁신, 곧 회개가 필요하다. 아니, 윙크의 어조는 좀 더 과격하다. 

 

우리는 악령에 사로잡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축귀다. 우리는 학계의 ‘좋은’ 의견에 대한 의존, 학계에서 정의하는 성공을 이루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 변증법상 거리 두기의 순간에 얼어붙은 파우스트적 왜곡,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향한 비판적 의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쓴 책이다. 그리고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바로 나다. (136)


   혁신이나 회개도 모자라 ‘축귀’가 필요한 상황이라니. 그가 이렇게 강한 파토스를 가지고 ‘역사 비평의 파산’을 외치는 이유가 뭘까? 그는 예언자적 외침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또한 ‘역사 비평’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근본주의자들과 한 통속인 걸까? 윙크가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역사 비평에 경도된 이들을 향한 축귀’를 통해 “인간의 삶을 변혁하는 성서 연구 방법을 제시하는 것”(16)이다. “성서 읽기와 연구 방식 자체가, 그 패러다임이 바뀌”(8)어야만 한다. 예수가 전한 복음은 근대주의가 설파한 ‘권위에 대한 인간의 자유’를 전하지 않는다.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복음의 핵심은 온전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8)


근대가 만들어 낸 ‘객관주의 이데올로기’

   먼저 윙크는 역사 비평이 다섯가지 이유를 근거로 파산했다고 확진 판정을 내린다. 성서의 저자들은 자신들을 야훼 신앙, 그리스도 예수의 신앙으로 이끈 사건들을 증언한다. 더하여 성서를 읽는 이들의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북돋기 위해 성서를 저술했다. 그러나 ‘역사 비평’은 이러한 본문 의도와 상응하지 않는다. ‘역사 비평’ 연구자들은 성서의 관심과 의도에 철저한 거리 두기를 하고, 성서 자체를 철저하게 대상화 한다. 또한 ‘역사 비평’은 ‘객관주의라는 이데올로기’[1]에 빠져 기만적인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객관주의’가 기만적인 의식인 이유는 이상이 아니라 허상이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대상과 거리를 둘 수도 없을 뿐더러 자신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역사 비평’을 위시로 한 성서 연구는 “기술주의의 포로가 되었다.”(29) 기술은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명령에 따라 작동 될 뿐이다. 어떤 연구에서든 기술은 필수적이기에, 기술 자체가 먼저 “적절한 해석학 아래 놓여야”(31) 한다. 그러나 ‘역사 비평’은 자연 과학에서 방법론을 가져와 성서를 기술적으로 비평하였고, 성서 본문의 의도와 관심, 독자와의 상호 작용은 묻지 않았다. 그저 사실fact만을 기술적으로 다룰 뿐이다. 원래 ‘역사 비평’은 정통주의의 군림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진보적인 교회의 유용한 도구”였다. 둘의 대립과 싸움이 팽팽할 때는 ‘역사 비평’의 결과물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31) 그러나 ‘역사 비평’의 승리가 확실시 되자 교회 공동체로부터 성서 비평은 괴리되었다. 성서 비평은 교회 공동체가 아닌 학계에서만 말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되었고, 교회 공동체는 “말씀의 백성이라는 자의식만 남았고, 이에 대한” 신학의 비판적, 건설적 조언은 사라지게 되었다.

   성서 비평 자체가 계몽주의 시기 교회의 권위를 향한 격렬한 논쟁과 이에 대한 변증을 위한 수단으로 탄생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성서 비평이 받아들여지는 맥락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역사 비평’이 탄생한 것이다. 계몽주의의 아성에 대항하여 성서 비평은 변방에서 중심부를 향해 저항했다. 그러나 오늘날 성서 비평은 또 다른 중심부를 이루었고 이제껏 알아차리지 못했던 “성서 비평의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드러”(34)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비판 이후의 시대”, 폴 리쾨르가 “제2의 순진함”이라고 부르는 해석학적 단계, 곧 “신앙이 성서 비평과 관련된 우상을 파괴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한 시기”이다.(36)


"역사 비평은 파산했다. 말 그대로 '파산'했다." (19)


   ‘역사 비평의 파산’으로 인한 새로운 경영 방침이 필요한 이때, 윙크는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있을까? 그는 오랫동안 성서 연구의 패러다임이었던 ‘역사 비평’을 새롭게 할 “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바로 “변증법적 해석학”dialectical hermeneutic[2]이다. “변증법적 해석학”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1.     융합Fusion

첫 번째 부정: 대상을 의심함으로써 융합을 부정negation

2.     거리두기Distance

두 번째 부정: 주체를 의심함으로써 부정을 부정

3.     친교Communion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그 유산과 융합하는 순진함의 단계, 그리고 객관화를 통해 유산에 거리를 두면서 융합에서 벗어나는 단계 사이에는 유산에 거리를 두면서 융합에서 벗어나는 단계 사이에는 부정이라는 계기가 놓여 있다. … 그리고 거리 두기 단계와 친교 단계 사이에는 부정의 부정, 의심하는 사람에 대한 반동으로서 또 다른 의심, 분석자에 대한 분석이라는 계기가 존재한다. 이 두 번째 부정은 독자와 본문이 상호 작용하는 길을 열어 개인과 사회의 발달이 가능하게 만든다. (48-49)


   융합은 전통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있는 상태이다. 전통은 우리의 주관성보다도 앞서 존재한다. “우리는 전통을 통해서 본다. … 전통은 우리의 지평이다.”(49) 융합 이후에는 의심하는 단계가 찾아온다. “감히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부정, 유산을 대상화함으로써 유산과 거리를 두는 과정이다.”(50) 첫 번째 부정을 통해 성서 비평은 성서를 교회 전통에서 분리하고, 성서를 대상화한다. 성서 학자는 대상화를 통해 “성서 그 자체의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한다.”(54) 따라서 이어지는 단계인 거리 두기는 성서를 대상화한 결과로 ‘소외된 거리’를 얻게 된다. 대상화를 통해 “이득을 얻으나 무엇을 잃는 것은 주체만이 아니다. 대상도 무언가를 잃는다.”(56) 한번 더 강조하자면, “대상화는 자신을 서 있게 하는 바탕과의 친교에서 벗어나 독립한 결과 나타나는 소외된 의식이다.”(59) 거리 두기는 이러한 이중성을 지녔기에 거리 두기를 바탕으로 한 성서 비평 또한 양면성을 지니게 된다. “성서 비평은 사람들이 신경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문화적 역할을 수행”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반면에 이러한 성서를 대상화한 해체 작업 이후 재구성 작업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객관주의를 부정해야 한다.”(65) 두 번째 부정: 주체를 의심함으로써 부정을 부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는 객관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허상에 빠진 ‘근대적 인간의 확신’을 무너뜨리는 작업이며, 성서를 대상화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작업이다. 윙크는 이 단계로 넘어서지 못한 ‘역사 비평’에 파산을 선고하는 것이다. 부정의 부정은 A. 지식 사회학적 분석B.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통해 이뤄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보지 못했던 이데올로기적 편견과 맹목을 지식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정신 분석학적 접근을 통해 우리가 본문을 읽는 방식 자체를 검토하여 마침내 ‘우리가 성서 본문을 통해 찾고자 하는 것은 일반적인 종교적, 신학적 진리, 저자의 본래적 생각이 아니라 본분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을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존재에 관한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정에 대한 부정, 곧 성서를 대상화한 우리를 파괴하고 부정하여 우리는 본문과의 친교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성서 본문과 해석자의 친교를 위해서는 주체-대상의 이분법을 넘어서 주체-대상의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성서 본문과 독자는 ‘대화’를 통해 서로 간의 ‘소외된 거리’를 극복하여 주체와 대상 모두 보존되는 ‘관계적 거리’를 형성한다. 이렇게 본문과의 친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해석은 윙크가 회복하고자 하는 ‘참된 객관성’을 가능하게 한다. “해석자가 자신과 대상을 동시에 성찰할 때만, 그리하여 객관적 구조가 설정될 때만 대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115)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주체-대상의 이분법이 주체-대상과의 관계로 나아가게 되면 “본문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의 삶은 변혁될 수 있다.”(116) 따라서 해석자의 관심은 본문과 거리 두기에 실패한 결과물인 편견이 아니라 본문과 친교를 위한 핵심 동인이다. 부정의 부정을 거친 독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본문에 귀 기울이게 되고, 본문을 통해 독자는 자신을 알아간다. 이것은 한 번의 깨달음으로 이를 수 있는 정점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반전을 통해, 곧 반정립이 곧이어 새로운 정립이 되고, 그 정립은 또 다시 새로운 반정립에 자리는 내주는 방식으로’(123) 이어진다. 윙크는 주장하길, 자신이 제시하는 “변증법적 해석학”은 신학과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게 한다. ‘학문은 다수를 위해 소수가 익히는 것이기에 신학생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진정한 역할은 성서학자가 아니라 인간의 변혁에 성서가 미치는 영향을 모든 이가 이해하도록 돕는 성서 해석자이다.’(128)


이렇게 하면 성서 해석자는 더는 ‘말씀-사건’의 실현이라는 과제를 설교자에게 미룰 필요가 없다. “나는 연구를 할 테니 당신은 설교를 하시오”라는 말로 대표되는 연구와 설교의 분리는 정당하지 않다. (128-129)


   의심의 해석학을 거쳐 마침내 본문과의 화해 및 친교를 이룬 윙크의 “변증법적 해석학”은 마침내 ‘역사 비평’의 본연의 목적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관심사를 공유하며, 연대하는 마음으로, 성서 본문을 중심을 함께 모인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우리는 본문에서 단순히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 희미하게만 감지하고 있는 것을 배우기를 고대한다. 내가 변화하는 힘이 있더라도 응답해야 한다. 우리가 변화될지라도,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드물지만, 듣고 명료한 깨달음과 용기를 갖게 되는 순간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 (129)
 


거리두기에서 참여하기로

   이 책의 부록에는 윙크의 신앙과 신학의 여정이 담긴 회고록이 실려있다. 윙크는 그저 ‘역사 비평은 파산했다’는 도발적인 언설로 학계의 성서 비평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내세운 ‘역사 비평’의 새로운 경영 방침, “변증법적 해석학”을 통해 성서 본문과 친교를 이루기 위해 분투했다. 분투의 여정에서 발견한 본문이 말하는 진리truth에 정직하게 반응했다. 그는 본문이 일으키는 ‘변혁’에 동참하기 위해 세상에 맞섰다. 이 책은 그 분투의 여정에서 그가 맺은 하나의 열매이다. 윙크는 『성서는 변혁이다_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하여』 출간으로 뉴욕 유니온신학교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고 한다. 이것 만이 아니다. 그는 군사 독재 정권 아래서의 삶이 어떠한지를 경험해보기 위해 칠레로 갔다. 그곳에서 예수의 “비폭력이 지배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지 않고 권세들의 지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확신하게 되었다.”(171) 그는 같은 이유로 또 다시 남아프리카의 독재 정권을 방문한다. 그 결과물이 『남아프리카의 폭력과 비폭력』이다. 이렇듯 신학계의 성서 학자가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발자취로 인해 그는 신약학자이나,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 정치 신학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Walter Wink (May 21, 1935 – May 10, 2012)


   나는 여전히 신학이 세상과 교회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내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걷게 하는 핵심 동인이고, 목회자라는 자기 정체성이 흔들릴 때마다 여전히 목회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게 한다. 생각해보면 이 믿음은 신학의 세례를 받기 훨씬 이전부터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형성해왔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여정에서 이성은 꼭 필요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신앙은 관념이 아닌 삶의 문제이고,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관건이다. 예수의 복음은 우리를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하고 있다는, 회복의 자리로 나오라는 기쁜 소식이다. 어쩌면 신앙의 여정에서, 성서 연구와 읽기에서 끝까지 견지해야 하는 자세는 ‘내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하고 있는가?’라는 메타인지일 테다.

   지금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이유,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 신학함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현학적인 최신 신학 이론을 접해서가 아니다. 나조차 나를 용납할 수 없을만큼 추락했을 때, 인생의 고비마다 맛 본 실패로 인해 절망하여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겠다고 자포자기 했을 때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성서는 나에게 한 줄기 빛을 비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다독여줬고 그렇게 나는 상처와 실패를 끌어안은 채 성서를 집어 들었다. 성서는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가며 나를 변혁했고, 나를 변혁하는 말씀은 새로운 삶의 자리로 나를 끌고 갔다. 내가 실패해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신앙과 말씀이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이 신학의 자리로 나를 이끌었다.

   처음부터 나를 형성하고, 변혁해 온 말씀을 다시 집어든다. 나는 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아간다. 때때로 찾아오는 말씀에 대한 ‘거리 두기’는 마침내 말씀과의 더 깊은 연합, 친교를 향한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필요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낙타는 사막을 ‘건넌다’. 그리고 마침내 ‘오아시스’에 다다른다. 리쾨르의 말마따나 ‘우리는 비평주의의 사막을 지나 다시금 부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성서를 대상화했던 오만함을 넘어서서 성서의 부름을 듣고, 그 부름에 응답하여 대화를 이어나가려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대화는 나를 또 다시 ‘변혁’시키리라 확신한다.






 <주>         

[1] “객관주의란 어떤 현상에 거리를 두고 감정, 의지, 관심, 편견을 개입시키지 않으면서 관찰하는 학문적 이상”(24)을 뜻한다. 윙크는 ‘객관주의’와 ‘객관성’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객관주의’라는 이데올로기와 ‘개관성’은 분리함으로써 “객관성의 새로운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29) 책의 후반부에서 윙크는 객관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객관성이라는 목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객관성이란 그저 정직을 조금 특별하게 일컫는 말이 아니라, 타자와 타자의 권리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담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객관성은 낯선 이의 말을 정확하게 들으려는 분투다.”(125)


[2] 『성서는 변혁이다_성서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하여』 47쪽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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