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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Sep 15. 2024

띵동

아는 것이 힘 VS 모르는 게 약

아는 게 힘 VS 모르는 게 약

고등학생을 키우면서 느끼는 건 단연코 모르는 게 약이다. 하나 나를 비롯한 지금의 부모들은 너무 많이 알고 싶어 한다. 이유는 단순 명료하다. '안전!. 너의 안전을 위하여,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난 너에 대해 좀 알아야겠다. 난 부모니까.' 이런 니즈에 걸맞게 갖가지 어플들이 만들어졌고 아이들의 생활을 미러링 하고 싶어 한다. 아이들의 사생활은 사라져 가고 있다.


띵동. CU편의점 3200원. 띵동. 메가커피 2400원.

'이놈은 편의점 갔다가 또 카페를 들른 거야?' 여기서 놈은 친근함의 다른 표현이다. 절대 화난 거 아니다.

띵동. 역전우동 6000원.

'학교 석식 안 먹고 나와서 이거 사 먹는 거야?'

띵동. 롤링파스타 15000원.

'한 끼 식사를 거하게 잡수시는군' 비꼴 때 극존칭은 효과적이다.


아이의 카드사용 내역이 친절하게 알림음을 내면서 '아드님이 지금 여기서 이걸 드셨습니다'라며 보고해 준다. 예측한 시간과 장소가 불일치하다 느낄 때는 궁금한 극성엄마모드가 장착되어 전화를 걸기도 한다. 물론 한 번에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들 전화는 본인이 필요할 때 발신용에 최적화되어 있어 수신용은 놓치는 게 많다. 청소년들이 쓰는 폰은 대부분 그렇다는 엄마들의 증언으로 우리 아이만 그런 건 아니라는 위안을 삼는다. 가장 화날 땐 '왜 우리 아이만!' 일 때고 위로받을 땐 '우리 애만 그런 건 아니구나' 싶을 때다. 카드 사용내역에 의구심이 들다가도 결론은 '그래! 학교, 학원 다니느라 지칠 텐데 사 먹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잘 먹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됐다'로 이해하면서 정리된다.


띵동. 잘생긴 학생 7시 수학학원에 등원하였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잘생긴'으로 바꿔 적는다. 실명은 좀 그렇고 잘생긴 건 맞으니까. 엄마 기준이다.)

'10분 전에 가래도 꼭 저렇게 시간 딱 맞춰 가네'

띵동. 시험점수 몇 점, 반에서 몇 등, 평균 몇 점. 숙제 미흡.

여기서부터 분노게이지 상승이다. 이것저것 거하게 사드시고 다녀도 뭐라 하지 않고 내버려 둔 건 공부하느라 힘들 텐데 소확행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는데 공부는 열심히 안 했군. 와! 이 녀석을 그냥. 오늘 저녁 기대하시라.

학원에서 돌아오기를 씩씩대며 기다린다. 아들이 피곤한 얼굴로 들어온다. 피곤하거나 말거나 "너 이리 와서 앉아봐. 학원 시험점수는 어쩌고 숙제는 블라블라." 레퍼토리 똑같은 래퍼로 변신해서 떠들어댄다.

아들은 나름의 이유들을 가져와 이야기한다. "수행평가가 많아서 숙제를 다 할 수 없었고 한 장 못해간 건데 선생님이 문자 보낸 거라고요" 앗! 내가 명명한 고요체 등장! '알았다고요' '한다고요' 알지도 못한 것 같고 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말만 뱉을 때 쓰는 어법을 고요체로 정한 나는 변명을 늘어놓는 아들에게 화가 난다. 시작은 그게 아니었는데 점점 유치하게 석식 안 먹고 나와서 밥 사 먹은 이야기까지 들먹인다. 모자의 싸움은 승패도 없는 어색함만 남는 경기로 끝이 난다.


띵동. 잘생긴 학생 11시 32분 스터디카페에서 퇴실하였습니다.

'올 때가 됐는데 왜 안 오지?' 또 전화를 건다. 사랑과 관심. 세상이 험하니 일종의 염려. 널 의심하는 건 절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어디 샛길로 새는 게 걱정인 걸까? 밤길이 걱정인 걸까? 둘 다겠지?


독서실에서도 언제 들어가고 나오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문자가 온다. 이것도 미덥지 않아서 관리형 독서실이라 수식어를 붙여놓은 독서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물론 관리형이라는 글자수만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 늘어난 글자수만큼 비용도 더불어 증가한다. 그래도 부모들은 누군가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스터디카페에서 딴 짓은 안 하는지, 졸지는 않는지 관리? 감독? 좀 더 솔직하게 '감시!'를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비싼 비용에도 유명한 관리형 독서실은 대기를 걸어놓고 누군가 빠지기를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인 걸 보면 감시자에 대한 갈망은 분명해 보인다. 그뿐인가? 수백 개가 넘은 온라인 교육카페에서 각 고등학교 입결을 알려주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가 끝나기 무섭게 시험분석영상을 올린다. 거기에 학원 홍보에 앞장서줄 아이들의 높은 점수도 공개한다. '본학원 학생 물리 1등급, 화학 1등급 몇 명!' 알고 싶지 않은 정보들을 알아버리고 내 아이의 위치를 파악하고 '우리 아들이면 좋겠다' 생각하다 페이지 우측상단 X자를 눌러 닫아버린다. 모르는 게 낫다. 남의 집 아이들 성적.

이렇게 난 아들이 어디서 무엇을 사 먹고 몇 시에 학원에 갔으며 숙제를 잘해왔는지 등등 많은 정보들을 받는다. 아는 게 힘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문득!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네 부모님은 내가 어디서 무얼 먹는지 알 수 없었다. 독서실에 가서 가방만 던져놓고 나가서 놀다 오는지 가기는 간 건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믿었고 부모님은 의심하지 않았다. 먹고살기 바빠서였을 수도 있지만 증거가 없기도 했다. 학원에서 아이들 평균이 몇 점이고 내가 거기서 몇 등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지금처럼 온갖 매체에서 입결을 알려주며 비교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사이가 좋았을 수도. 한 번쯤 땡땡이도 쳐보고 문제집 산다고 받은 돈으로 떡볶이 사 먹던 그때의 추억을 요즘 아이들은 알까? 하기야. 이것도 우리 부모님 입장에서는 추억이 아니겠지만. 너무 많은 정보가 부모님에게 전달되는 요즘. 아이들도 숨 막히고 그걸 알고 나니 신경 쓰여 초연하지 못한 나도 숨 막히고. 그러면서도 아들의 추억 만들기에 마냥 큰 박수를 쳐줄 수 없는 부모 아닌 학부모가 되어있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란다. 물론 실제 꽃말은 아니지만 1학기 중간고사를 볼즈음 온 세상이 핑크빛으로 물들어서 생긴 말이다. 웃픈 해석이다.

추석연휴다. 연속으로 쉼이 들어간다는 의미에서의 연휴. 그러나 고등학생에게 추석의 절기말은 2학기 중간고사다. 곧 치러질 중간고사를 대비해야 하는 시기다.

꽃을 꽃으로, 명절을 명절로 즐기지 못하는 고등학생이 측은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난 오늘 아침에도 아들을 깨워 스터디카페에 보냈다. 진부한 말로 위로하며.

'지금의 애씀이 너에게 꽃길을 만들어 줄 거야' 전혀 와닿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아는 게 힘인지 모르는 게 약인지 헷갈리지만 공부 열심히 해서 아는 건 너에게 힘이 되고 난 적당히 알아서 모르는 게 약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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