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이드 재판독
2차 병원 조직검사 슬라이드를 대학병원에 제출하고 기다렸다. 갑상선 세침검사에서 베데스다 3단계로 애매한 상태가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결과만큼이나 애매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낸 지 약 한 달 만에 교수님을 만나는 날이다.
처음도 아니고 암이었다 애매하다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라 어떠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파블로프의 개' 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종소리가 울리면 침을 흘리는 개처럼 병원을 가는 날이면 어딘가 구멍이 나서 무언가 줄줄 새고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 나의 조건반사다.
내 상태에 대한 객관적인 지표들을 이용해 챗 지피티를 비롯, 의학 커뮤니티에서 자료를 수집해 공부했다. 감정에 치우쳐 나를 극한으로 몰 여지가 있는 글은 과감히 패스하는 요령도 생겼다. 건강 관련 커뮤니티를 현명하게 이용하는 법쯤은 이제 통달했다.
베데스다 3단계가 나온 경우 추적관찰 후 수술여부를 결정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기에 난 오늘 재검 날짜를 잡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진료실 앞 전광판을 바라봤다.
또 부른다. 내 이름! 오래 살라고 자주 불러주는 내 이름!
교수님과 짧게 인사하고 타 병원에서 받아온 조직검사 결과를 보고 긴 설명이 이어진다.
"초음파와 조직검사를 전체적으로 고려했을 때 수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에는 두괄식이다.
"보통 3개월 뒤에 조직검사를 다시 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요?" 뭘 안다고 아는 척을 했다.
내 질문에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설명이 자세하고 친절하게 시작되었다.
여포성 증식 없이 단순히 비정형 3단계만 나왔다면 추적관찰 후 재검을 하지만 여포성 병변이 나온 경우는 진단적 수술을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암의 종류를 설명하기 위한 예쁜 과일 그림이 있는 차트를 꺼내서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한다.
갑상선암은 크게 유두암과 여포암으로 나뉜다. 유두암은 딸기나 수박처럼 단면을 보고 무슨 과일인지 바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명확하게 나타나는 암이고 여포암은 단면만 보고 귤인지, 오렌지인지, 한라봉인지 알 수 없는 감귤류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 감귤류 중 일부는 암이라 했다. 칙칙한 암을 설명하는 것치곤 안 어울리는 상큼한 과일 그림들이 많이 등장했다.
내 세침검사의 결과는 감귤류의 단면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떤 과일인지 수술로 꺼내서 보자는 얘기다.
"몇 개월 지켜본다고 해도 결국 수술하게 될 케이스예요." 수술을 두려워하는 나에게 이건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쐐기를 박는다.
추적관찰 아니고 즉시 제거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유두암은 림프를 통해 전이가 되는 반면 여포암은 혈액을 통해 전이가 되기 때문에 조금 더 예후가 좋지 않고 공격적이라 했다. 나 같은 케이스는 여포암일지 유두암일지 수술을 해봐야 알 수 있기에 두 경우의 가능성을 모두 염두하고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엽에 두 개가 있기 때문에 일단 오른쪽 반절제만 하고 혈관 전이여부를 확인한 후 만약 전이가 되었으면 왼쪽도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단다. 그 이후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까지.
'하. 이건 또 무슨 소리.'
높은 확률은 아니지만 여포암일 경우 10명 중 1~2명은 반대쪽 재수술을 한다고 한다.
'그냥 이쯤에서 미쳐버릴까?'
환자 위치에 오래 있다 보면 작은 확률에도 모든 것이 요동친다.
"오른쪽 떼면서 수술방에서 검사하고 전이되었으면 왼쪽도 한꺼번에 떼어주시면 안 되나요?"
유방암 수술해 봐서 뭐 좀 안다고 오더를 내리려 하고 있다. 수술 한 번으로 안 끝날 수도 있다니 아찔했다. 아직 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럴 경우의 수를 설명해주고 있는데 또 한참 앞서 가있다.
기술적으로 그건 안된단다. 유방암은 그런 경우가 있어서 물어봤는데 이건 림프가 아닌 혈관으로 퍼지는 거라 그 방법은 안된다고. 먼저 반절제하고 검사 결과에 따라 재수술 여부를 결정하는 방법을 따라야 한다.
"그럼 이번에 수술할 때 한꺼번에 선제적으로 다 떼어내면 안 되나요? 걱정하며 사는 거 너무 힘들어요."
"그건 안됩니다. 의학적으로 맞지 않아요." 친절한 말투에 단호함이 있었다.
병원놀이 소꿉장난도 아닌데 뭘 자꾸 전부 떼어달라고 하는 건지. 정해진 매뉴얼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 두려움에 억지제안을 하고 있다.
아. 복잡하다. 그래도 공부를 많이 해 놓은 덕분에 똘똘하게 질문했고 의사 선생님도 말귀를 잘 알아듣는 우등생 환자가 온 것처럼 아주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의사 선생님의 통상적인 단순한 위로가 가끔은 큰 힘이 된다.
재검 날짜 잡을 거라 생각하고 왔는데 수술 날짜를 잡았다. 오늘도 예상이 빗나갔다. 많은 것 안 바란다고 했는데. 예상 밖의 산뜻함은 안 바랄 테니 그저 예상대로만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자꾸 빗나가니 짜증이 났다.
한편으로는 수술하면 이 애매한 스텐스는 이제 정리가 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최소한 애매함이 주는 공포에서는 탈출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유방암 치료할 때 항암치료를 위해 심었던 포트자리가 아직도 심하게 우둘두둘 거리며 자국이 남은 걸 보고 유방외과 교수님이 켈로이드 피부라고 했다. 마음의 상처야 뭐 어쩔 수 없지만 외관으로 보이는 몸의 상처는 최소화하고 싶어 로봇수술을 하기로 했다.
수술 전 검사일정을 잡는데 유방암 정기검진 일정과 맞물려 두 가지 암을 염려해야 하는 것이 서글펐다.
그래도 처음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울지도 않았고 야무지게 질문도 하고 수술상담도 잘 마치고 왔다.
3월 중순 갑상선 CT를 시작으로 다양한 검사에 수술까지 스케줄이 빼곡하게 잡혀있다. 또 얼마나 가슴 뛰며 살 것인지 벌써부터 두근거린다.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유방과 갑상선을 같은 병원에서 수술하다 보니 스케줄 잡는 게 편한 점도 있다. 참도 좋다.
3.16 갑상선 CT
3.27 유방암센터 압노바, 타목시펜처방
3.31 갑상선 흉부엑스레이, 심전도, 폐기능검사, 유방암 초음파, 엑스레이
4.3 채혈, 유방암 복부 흉부 CT, 뼈스캔
4.9 갑상선 수술 전 검사결과 진료, 유방암 4년 6개월 정기검진 결과 진료
4.16 갑상선센터 입원
4.17 갑상선 수술
수술했는데 암이 아닐 수도 있고 암일 수도 있다. 또 기다려야 하는 여전히 애매한 상태지만 애매하게 살지는 않기로 했다.
난 괜찮다. 조금 귀찮은 일이 생겼을 뿐이다.
'그나저나 나는 나대로 잘 산다' 브런치 북 제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