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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Feb 15. 2024

오늘도 애썼다.

왔다 갔다 하지만 제자리 잘 찾는 편

사십 대 중반어울리지 않는 노부부 놀이 중인 나는 아침이 여유롭다. 바삐 아침을 차릴 일도 없고 가방은 잘 챙긴 것인지 체크할 아이도 없다. 딸은 대학캠프를 떠났고 아들은 아직 윈터 기숙학원에 있다.

자의와 타의로 모두 떠난 빈자리의 여유가 쓸쓸함으로 번지는 날이 있다. 오늘 같은 날.

'복작복작' '시끌벅적'정신없는 아침이면 제발 모두가 일찍 자기의 자리로 나가길 바라면서 '격하게 혼자이고 싶다' 했던 날도 있었는데 말이다.

예전에 맞춰놓은 알람은 오늘도 내가 일어나야 하는 줄 알고 울려댄다. '안 일어나도 돼' 하면서 휴대폰을 뒤집는다. 아침 운동을 다녀오겠다는 신랑에게 이불속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인사를 하고 다시 눈을 감는다. 눈은 감았는데 생각은 떠진다. 쓸데없는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일단 감사부터 하자. 오늘 눈 떠서 새 날을 맞이함에 감사한다. 스케줄러를 열어 오늘 해야 하는 일들을 체크한다. 운동 갔다가 돌아온 신랑의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몸을 일으킨다.

오늘의 주요 뉴스를 틀어놓고 샐러드에 커피를 마신다. 시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사회면은 마음 아픈 소식이 나올까 봐 보기가 꺼려진다. 정치면은 화가 나기는 해도 마음  아플 일은 적어서 편하게 본다.


열시다. 탁구를 가려고 집을 나선다. 주차장에서 차가 고개를 내밀고 나가자 어는 비가 내려와 앞 유리창에 들러붙는다.

어는 비. 눈이 되기엔 따뜻하고, 비가 되기에는 추운 그런 날 내리는 반쪽짜리 눈 같은 비가 내린다.

기막힌 타이밍이다. 라디오에서 바이올린 협주곡이 나온다. 음악 문외한인 나조차도 비 내리는 날 바이올린 소리는  감성 폭발하기에 충분하다.  어제 전화통화로 이말저말 마구 해댔던 엄마와의 통화가 생각났고 그냥 이런저런 생각들이 눈처럼  내려와 흩어졌다. 좀 더 친절할걸 그랬나.

살짝 센티해지려는데 탁구장에 도착했다.  또한 다행이다. 조금 더 달렸으면 울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탁구장이 있는 건물 주차장 입구에서 울리는  출차 사이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기서 잠깐 딴생각. 생각에도 출차 사이렌처럼 경고음이 울리면 좋겠다. 이상생각이 들어오려 하면 '에엥에엥'하면서 주위환기를 시켜주고 정신 번쩍 들게 해주는 뭐 그런 거. 그럼 예기치 않은 이상한 생각에 부딪히는 사고는 안 날 텐데*


언제 울적했냐는 듯 탁구를 신나게 -감정기복이 세계 챔피언급이다-치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 점심을 먹는다.  '혼자'에 방점이 찍히면 슬퍼지니까 '먹는다'에 집중해 보자. 오늘 점심은 김치 비빔국수다. 밀가루 자제하라 했지만 김치가 주인공이니까 괜찮다. 김치는 살 안 찐다.


두시 되기를 기다린다. 두시에 수강신청을 해야 한다. 문화센터 강좌 신청날이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집중하고 초침이 12를 가리키자마자 눌러야 성공할 수 있다.

내 도전 과목은 '중년의 글쓰기'와 '유튜브 크리에이터 되기'이다. 써놓고 보니 수강 전부터 벌써 그럴싸해 보인다. 그렇다면 일단 나는 중년인가? 아마도 중년인  듯하다. 평균수명 절반이상  살았으니  인정하기 싫어도 중년이다. 그런데 유튜브는 중년이 하는 것인가? 여기서 살짝 주춤했다. 따라갈 수 있을까? 소위 MZ라 불리는 이들만 오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전한다.


두시다. '타닥타닥' 부산하게 자판을 두드려  두 과목 모두 수강신청에 성공했다.

일단 성공했으니 잠시 뿌듯하고 왜 글쓰기와 유튜브인가 고찰에 들어간다. 감성 터지는 날에 맞게 생각해 보니 결국 둘 다 기록이다. 매우 다른 형태처럼 보이지만 두 가지  모두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행동들이다. 난 기록하고 남기려는 본능이 강한 사람인가 보다. 유전자 번식은 아니더라도 나에 대한 기억을 오래도록 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책을 쓰고 싶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도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람이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었다. 이제 유튜브까지 배워서 영상까지 남길 계획이니 나를 잊을 생각은 마시라.


세시다. 도서관 봉사 갈 시간이다. 아파트 작은 도서관에서 주 1~2회 봉사를 한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봉사한다기보다 도서관이 나에게 봉사 중이다. 도서관에 내려와서 책을 보거나 때로는 서가를 정리하며 제목만 훑어봐도 힐링이 되고 있으니 봉사는 내가 받고 있는 게 맞다.

신간이 수십 권 들어왔다. 등록을 앞두고 가지런히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예쁘다. E-book이 많아져도 종이책의 감성을 따라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특히 나 같은 감성쟁이에게는 더더욱 종이책이 승리다.

그렇게 도서관에게 봉사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눈으로 바뀌어서 한참을 내리다 그치고 해가 난다. 나만큼이나 변덕이 심한 날씨다.

아침의 우울감이 김치국수에 비벼져 사라지고 수강신청에 들떠서 잊혔다. 결국 해가 나고 마무리된 오늘처럼 감사로 마무리한다. 중간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백번 탈지언정 시작과 끝이 감사라 다행이다.

많이 흔들리는 사람이지만 제자리도 잘 찾아오는 편이다. 그래도 좀 덜 흔들리고 그 자리에 그냥 우뚝 서 있고 싶다. 혹시 너무 흔들리다가 내 자리 못 찾고 헤매게 될까 봐 살짝 걱정이 될 때도 있으니까.

그때마다 안전하도록 내 마음의 사이렌이 울려주기를.


그나저나 오늘도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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