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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 어때 Mar 09. 2024

전지적 이쁜이 시점

예의가 있어야 사람이지

'징~징~징~'

다음 날로 넘어가기 20분 전인 밤 11시 40분이다. 연달아 카카오톡 알림 진동이  울린다. 이 시간에 뭐지?

'엥? 이게 누구야? 잘못 보냈나?' 뜬금없는 사촌 남동생 이름이 뜬다. 친분이라고는 전혀 없어 성까지 박아서 이름 세 글자로 딱 저장된 이름과의 대화방이 열려있다. 한 번도 개인적으로 통화해 본 적이 없었으니 저장되어 있는 줄 도 몰랐다.

여기서 사촌동생이라 하면 작은아버지의 큰아들이다. 실명 밝히고 싶지만 한번 참는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 제법 형제간에 왕래가 있던 어린 시절에 큰집에 자주 놀러 오던 꼬맹이로 시작해 그 이후 머리 좀 컸다고 시건방을 떨 때부턴 뭐 거의 남이나 다름없이 지내던 놈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놈은 그놈의 인생을 사는 것이니 나한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뭐든 오케이 하는 입장이다.

내가 많이 아파 병원에 있을 때도 안부 연락 한번 없었던 놈이 이 시간에 어쩐 일. 안부 인사 없었음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나도 해준 것 없는 누나이고 접점 없이 사는 게 편한 사이였으니까 이해한다. 그런 놈이 오밤중에 카톡을 보내왔다.  물론 안부 인사 일리 없고 불가피하게 이 시간을 택할 만한 사유가 있는 사안도 아니었다.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황당한 문장이다.

잘 모르겠다 하니 얼마나 잘났는지를 알려줘야 하나. 아니면 글은 그렇게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부터 가르쳐야 하나. 너무 어이가 없어서 창을 열어놓고 뭐라 쓰는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카톡은 새벽 두 시가 넘도록 모욕적인 말과 욕으로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무슨 오해가 있냐며 응대하다가 이말 저말 헛소리 중이구나를 인지했다. 같이 욕하지 않고 차분한 척 응대한 나를 칭찬한다. 앞뒤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문장에 엉망인 맞춤법 오류들을 보고 누가 볼까 내가 부끄러운 지경이었다. 보아하니 술을 마셨음이 분명했고 일단 쓰고 싶은 대로 쓰게 내버려 두었다. 사실 차단하지 않으면 술 마시고 날뛰는데 안 내버려 둘 방법도 딱히 없다. 차단하지 않고 그놈에게 지껄일 자유를 허락한 건 다음날 응징할 증거수집의 차원이었다. 모든 게 엉망인 메시지였지만 그 엉망 속에서 나 역시 분노가 차오르고 손발이 차가워지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수준 안 맞는 이야기에 반응하다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3년 전에만 걸렸으면(내가 아프기 전) 당장 전화를 하거나 그러다 화를 못 이겨 찾아갔을지도 모르겠다. '너 이 새끼! 딱 기다려! 넌 뒤졌어!' 딱 이럴 타이밍이었는데 그럴 힘이 없었다. 외부의 스트레스 요인에 가급적 휘말리지 않고 벗어나서 사는 게 내 삶의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그 안으로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큰 숨을 쉬고 참으며 생각했다. 이 놈이 왜 이럴까. 예상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작은 아빠-그놈의 아버지-는 비슷한 또래로 자란 나와 그놈을 자주 비교했고 결혼해서는 신랑과도 비교를 많이 해왔던 것 같다. 직접적으로 마주쳐서 얘기한 적은 없었지만 카톡 내용으로 짐작해 보니 그런 자격지심이 술을 먹고 폭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자란 놈 덕에 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이 무례함을 어떻게 되갚아 줘야 할지 고민하느라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 작은 아빠에게 전화해서 아들의 무례함을 이야기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게 인지상정이니 하나마나한 것 아닌가 생각하다가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황당한 일이라 꼭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카톡 내용상 작은 아빠의 평소 의중도 알 수 있는 말이 있어서 작은 아빠에게까지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전화를 했지만 최대한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난 사람이니까.

그 이후 그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는다. 어젯밤의 싸지른 말에 날 선 글쟁이가 되어 요목조목 반박하는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그것도 아주 예의를 갖추어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건조하게 썼다.

이런 걸 재능낭비라고 하는 건가?(그놈보다는 재능이 있다는 뜻이다.)

그걸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후 늦게 그놈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받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피할 이유는 없었고 사과를 받아내고 싶었다.

'제가 술을 많이 마셔서요. 죄송합니다.' '알았다. 잘살아라. 끊는다' 진심인지 알 수 없는 그놈의 사과와 전혀 진심이 아닌 나의 쿨함으로 간단하게 전화는 끝났다. 그놈과 긴 시간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았다.


법적으로 심신 미약은 감형의 사유가 된다.  '술을 많이 마셔서 기억이 없었다' 이것도 심신 미약에 해당이 된다는 게 너무 싫다. 술을 많이 마셔서 기억이 안 나면 잘못을 용서해줘야 하는 것인가? 그럼 술을 안 마시고 당한 사람의 상처는 어찌할 건데? 형법에서는 감경사유일지 몰라도 난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사과받고 쿨한 척은 했는데 몇 주가 지나도 그 악담들이 떠오르고 늦은 시간에 휴대폰이 울리면 불안하기까지 한 나를 보면서 한 번쯤은 털고 가야겠다 싶어졌다. 그놈 때문에 찜찜한 기운을 계속 품고, 문득문득 그날의 기분이 찾아오는 걸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때 한바탕 찐하게 욕을 퍼부어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억울해서 분이 안 풀린다.


분을 푸는 굿을 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글 쓰는 사람에게 척지지 말아라. 활자로 인쇄해 박제시켜 복수한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어쩜 이런 글은 잊히지도 않고 적절한 때에 떠오르는지. 뭐 대단한 작가도, 기자도 아니니 활자로 인쇄해 배부는 못해도 그냥 글로 써서 분풀이하고 더 이상 생각 않기로 하려고 한다. 어느 분의 댓글처럼 글쓰기가 주는 치유의 힘을 믿는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니 작은 아빠도 고모도 남이 된 느낌이다. 상관없다. 큰 기대를 하고 의지하며 지내온 사이도 아니었으니 크게 서운하지는 않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데 요즘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사실 요즘이라는 말로 다수가 그런 것처럼 묻어가려 했는데 우리 집의 얘기다. 친척들과 모두 잘 지내시는가? 나만 이상한가? 나만 쓰레긴가? 아무튼 난 묽은 피보다 진한 물이 더 좋을 때가 많다. 가족, 친척이라는 이유로 무례하게 굴어서 상처받고 남보다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 김창옥 교수님이 '가족을 사랑하려고 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고 예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내가 뭐 언제 그놈한테 사랑까지 해달랬나. 그냥 기본적인 예의만 지키며 살아도 되었을 텐데 아쉽다. 내 얼굴에 침 뱉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그놈은 내 얼굴이 아니다. 이렇게 사촌동생 하나가 사라졌다.


가족도, 친구도, 그 어떠한 관계를 유지시키는 건 예의다. 무례하지 않는 것. 친절까지 하면 더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예의만 지켜도 기본은 한다. 사람이라면 기본은 해야 할 것 아닌가.

가해자도 입장은 있을 터인데 그놈의 입장은 전혀 궁금하지 않기에 내 시점으로 쓴 글이다.

전지적 이쁜이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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