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9. 엄마와 와인잔

엄마를 엄마로만 보지 않는 법

by 이또숙

보수적인 경상도 집안의 맏며느리 이또숙 여사님.

오랫동안 어머니의 일복? 넘치는 삶을 지켜봐 왔기 때문일까,

우리 집엔 5남매 모두가 효녀이자 효자다.


나는 효녀 축에도 끼지 못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있다.

어머니께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년시절의 꿈을 독려하는 일.

간절히 바라셨던 배움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드리는 일.


아!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연휴 날 ‘억!’ 소리 나게 쌓이는

설거지 거리를 도와드리는 일도 포함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설, 추석 연휴가 되면

친척들은 우리 집으로 모인다.

다 같이 연락해서

한 번에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는 손님이 올 때마다

한 상 가득 차리고, 다과를 대접하고

설거지하는 일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그것을 보고만 있는 것이 힘들어서

20대 이후로는 친구 만나러 나가는 것을

뚝! 끊고 집에만 있었다.

설 연휴에 미국 학회가 잡혀서 빠졌던 것 말고는

단 한 번도 명절을 고향에서 안 보낸 적이 없는데 약 5년 전 처음으로 불가능 경험했다.


코로나로 인해 언론과 지역사회에서

자녀들을 고향으로

못 내려오게 해야 된다며

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 역시 불안함과

걱정스러운 마음이 컸는지

고향 가서 어머니를 돕겠다는 나의 고집을

꺾고, 끝내 못 내려오게 하셨다.


하지만 민족 대명절인 연휴에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사실상 출. 퇴근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고향을 내려갈 수 있게 되었고,

아버지는 친구에게 받았다며

갑자기 와인 한 병을 꺼내셨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분위기 잡는다며 와인을 종류별로 마시고

현관에 와인병들을 진열해 둘 정도로 와인을 사랑한 나였지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못 드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위해 좋은 곳 모셔가고,

좋은 것 함께 먹자 다짐해 놓고

정작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부모님도 좋아하실 거란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와인을 안 드시는 것은 물론이고,

고향 집에 와인잔조차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 - “엥? 우리 집에 이렇게

고급스러운 와인잔이 있었어요???”


엄마 - “엄마 시집올 때 사온 거니까

그게 40년 넘은 건데 처음 쓰네!!!!”




나보다 나이 많은 와인 잔으로,

아빠 엄마의 결혼 40주년을 추억하고 회상하며 즐겁게 저녁을 먹었다.


평소 주변인들에게 와인을 선물하던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부모님께 포도즙 한 번 건네 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갑자기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천하를 살피는 사람,

발아래 등불 못 보는 격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우리가 고향 내려갈 때,

맥주 한 잔, 막걸리 한 잔을 즐기셨지만

어머니는 평생 동안 술을 식도로 넘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셋째 언니가 독도로 여행 모시고 갔을 때,

'울릉도 막걸리' 한 잔 드셨다가 어지럽다며 쓰러지듯 잠드셨다는 소리를 듣고

엄마는 술 드시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집올 때 가져왔다던 와인잔을

40년 만에 처음 사용하던 그날,

어머니는 와인 한잔을 입에 머금으셨다.

태어나서 처음 맛본다는 와인을 음미하시다가 향이 풀잎 향 같고 좋다며 소녀처럼 기뻐하셨다.


그날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많은 판단들이 잘못되었음을 자각했다.

‘우주에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이고 흐르면서 변화한다.’

법정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 어머니는 변했다.

아니, 변화하고 있다.

10년 전에 내가 알던 우리 어머니는

눈 옆에 깊어진 주름만큼이나

지혜 또한 깊어졌고,

입맛, 취향, 성향, 가치관,

신체적 나이 또한 변하고 있었다.



이 날 이후 나는 생각했다.

한 사람의 인간존재를 안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현재 어머니의 상태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묻고, 또 묻고, 계속해서 살펴야 한다.

심리학적 성장 과정에서 엄마를 나와 같은 인간으로 인식하기 위한 3단계가 있는데,

그중 첫 번째는 어머니의 생애사를

상상하거나 탐색하는 일이라고 한다.



요즘 주변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와 용건만 나누는 관계가 된 것 같다.

엄마는 어떤 꿈을 품고 살았는지,

무엇이 삶을 가장 외롭게 만들었는지,

외할머니와 어떤 추억을 갖고 있는지 등등..


무용하고 무가치한

질문을 나누지 않는

건조한 사이가 된 것 같다.


엄마를 '엄마'가 아닌

한 '여성'의 존재로

다시 인식하기 위해,

더 많이 질문하고,

마주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