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제 나도 포함한
이 공간에 나에 대한 글을 올리기로 마음먹으며, 처음으로 나는 누구이고 어떤 단어들로 나를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살면서 마주하는 수많은 타인을 짧은 시간에 몇 단어로 특정 짓는 건 그렇게 잘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낱낱이 아는 내 자신을 설명하는 데는 애먹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럼에도 쥐어짜 보자면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라고 현시점 만 29.999세가 말했다) 아직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여자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학창시절 나는 대한민국에서 소위 말하는 ‘정도’의 길을 걷지 않은, 아니 백만리 정도 떨어진 삶을 살았다.
아빠는 고작 9살에 엄마를 잃은 나를, 혹여 다칠세라 과하다시피 보호하곤 했다.
그 사랑 덕에 내가 무탈히 성장할 수 있었지만 엄마의 부재, 다소 보수적인 아빠, 타고나길 대문자 ‘I’의 성격과 게으른 완벽주의까지 겸비한 나라는 사람의 콜라보는 그다지 생산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특성화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대학 진학과 취업의 기로에서 어떤 길도 택하지 않으며 무방비상태로 학교 밖에 내던져졌다.
나는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무용수, 연예인, 명문대생, 해커, 이민자, 선생님, 직장인, 세무사, 디자이너,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나의 흥미는 장르 불문 이곳저곳을 다 쑤시고 다녔고, 막내딸을 끔찍이 생각하는 아빠는 없는 형편에도 등골 빠지게 일하며 배움의 길을 열어주셨다.
문제는 매번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는 나였다. 실천력이 현저히 부족했던 나는 그 많은 시도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아버지, 죄송해요. 효도할게요).
그리고 차곡차곡 쌓여온 패배감과 피해의식은 내 꽃다운 20대의 절반 이상을 히키코모리 생활로 이끌었다.
그런 면에서 나와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오랑우탄(코코넛의 남편)과의 만남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다.
그는 전형적인 행동파로 나에게 다양한 경험을 선물하며, 혼자만의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준다. 가히 행운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오랑우탄과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새로운 세상 앞에서 덜 주저하는 나를 느낀다. 그럴 때면 내심 뿌듯해 어깨가 올라가곤 한다.
물론 가끔 그에게 팩트로 두들겨 맞고 뒤통수 얼얼한 건 비밀.
‘나 사람 잘 만나서 바뀌었고, 이제 잘 살아요!’와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이 공간에 적어나갈 이야기는 여전히 방황하고, 좌절하는 현재진행형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어떤 삶을 살아왔든, 나이가 몇이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한 현상이라는 사실도 전파(?)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당연한 것이 어떠한 시기가 지난다고 모두가 ‘짜잔’ 하고 현자로 탈바꿈되지 않으며, 고통의 연속이라는 인생을 어찌 매번 성숙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방황하고, 좌절하는 과정에서도 성장하는 것이다. 물론 성장의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나 아닌 그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 없다. n명의 사람이 있는 곳엔 n가지 삶의 방식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분명한 건 성장하려면 행동해야 한다. 아무리 깊은 깨우침을 얻었다고 해도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생각한 것이 있다면 일단 행동해서 결과를 보자. 해보고 영 아니면 그때 그만두면 될 일이다.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어서 도망치는 행위를 너무나도 많이 해본 사람으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백번 나으며 그 과정에서 나는 어떤 방향으로든 한 뼘 성장한다.
주저리주저리 말이 길었지만, 결론은 나는 서른을 코앞에 두고도 여전히 방황하는, 그러나 성장을 추구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