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녀는 잘 먹었다
연휴 마지막 날, 오랑우탄과 함께한 아빠와의 식사 자리였다.
“사실 얘가 어릴 땐 잘 먹어서 통통했거든. 근데 나는 그때가 제일 예뻤어.”
그때와 달리 지금은 잘 먹지 않아 서운하다는 말이었다. 종종 들어왔던 바였다. 아빠 눈엔 통통했던 그 시절의 내가 제일 예뻤다고. 실제로도 아빠는 잘 먹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양, 나를 기특해하곤 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지만 내 앞의 두 남자는 묘하게 바뀐 분위기를 금세 알아차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 자리도 마무리되었다.
어떤 부분에서 기분이 나빴냐는 오랑우탄의 물음에 나는 그저 ‘아빠가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해서’라고 말했다. 통통한 게 결코 자랑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상처받아 꽁꽁 묻어놨던 비밀이 만천하에 파헤쳐진 기분이었다고, 습관처럼 조금 먹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아냐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와 평소 좋아하던 카페에 들렀지만, 거짓말하다 들킨 아이처럼 시무룩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아빠가 미웠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밀린 빨래를 하고, 너저분한 거실을 치웠다. 전날 강릉에 다녀온 후 풀지 않고 있던 짐까지 싹 정리한 후 침대에 누웠지만, 이내 이곳저곳 흩어져있는 일회용 커피잔들이 거슬렸다. 벌떡 일어나 그것들을 한데 모아 버렸다. 일어난 김에 식탁과 싱크대도 깨끗이 닦았다. 나는 나에게 어떤 생각도 들 여지를 주지 않으며 부지런히 움직였다.
늘 그랬듯 오랑우탄과 저녁 식사를 하며 드라마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여자주인공 선뤄신 모녀(母女)와 남자주인공 치샤오 모자(母子)가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나왔다. 치샤오의 엄마가 치샤오의 어린 시절 일화를 풀어놓자 치샤오는 부끄러워했고, 치샤오를 제외한 나머지는 재밌어하며 웃었다. 다음 장면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마치 짠 듯한 공교로운 타이밍에, 사뭇 달랐던 아까의 식사 자리가 떠오를 즘이었다.
“저것도 쓸데없는 말 아니야? 치샤오는 화 안 내는데?”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니 보였다. 아빠는 잘 먹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정말로 그리워서, 식사 자리를 빌려 사위에게 장난식으로나마 서운함을 털어놓은 것뿐이었다. 부모가 자식의 연인에게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는 건 수많은 드라마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흔한 레퍼토리가 아닌가. 피해의식이 이렇게나 무섭다. 엉뚱한 곳으로 조준했던 원망의 화살은 거뒀지만, 아빠에게 연락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적는다. 아빠 미안. 괜히 눈치 본 오랑우탄도 미안. 그래도 사진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