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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렌체장탁 Jan 29. 2024

짧은 통화

엄마.. 미안... 그리고 사랑해

이 글은 2020-22년 사이 '좋은 생각'에 실렸던 글입니다.

(이거 쓰고 안마기 받았어요ㅎㅎ)







 오늘도 엄마에게서 ‘페이스톡’이 걸려왔다.


“아~ 왜?”


한 번도 그 흔한 ‘여보세요’ 로도 대답한 적 없이 맨날 ‘왜’ 전화했냐고 퉁명스레 받는 나다.


“왜는 무슨 왜? 내가 내 딸한테 그냥 전화하는 기다. 밥 먹었나? 별일 없나?”

“아 맨날 먹는 밥, 맨날 지내는 하루 뭐가 궁금해서 전화하는 거야. 용건 없으면 전화하지 말라니까!!”

“가시나. 한 번도 좋게 받는 적이 없어요. 됐다 마. 성질머리 보니까 별일 없네. 끊어라.”


 이 1분 남짓도 되지 않는 짧고 퉁명스러운 통화가 우리 모녀에게는 일상이다. 

그러나 이 일상적 통화에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숨겨져 있는지 기계 속 카메라를 통한 짧은 눈 마주침만으로도 우리 둘은 알 수 있다.


 나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살고 있다. 한국에서 번듯한 대기업 7년 차 대리였던 나는 젊을 때 외국에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어릴 적 소망을 이루고자 퇴사를 하고 이곳에 왔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퇴사를 만류하는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해외 취업이 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이탈리아행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훌쩍 한국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지가 어느새 또 7년 차이다. 이곳에서 한국인들을 위한 조그만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운영하고 있다.

 

 고집스럽고 유난히 도전적인 성향의 큰 딸을 어릴 때부터 잘 알던 엄마는 나를 말릴 수 없었고 그렇게 망연자실 자식과 생이별을 했다. 대기업을 다니던 예쁘고 자랑스럽던 큰 딸은 이제 외국에 살고 뭐 하고 사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는 걸 보니 거기서 굶어 죽진 않을 능력은 있나 보다며 안심하고 적응하실 때 즈음 ‘코로나19’라는 재해가 덮쳐왔다. 나도 나지만 우리 엄마는 사지에 자식을 보낸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새우셨다. 바이러스 초창기 때 한국언론에서 유난히 죽음의 나라로 그려졌던 ‘이탈리아’ 라서 맘고생이 더 심하셨다. 


 막연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자 경제적인 문제가 또다시 나를 괴롭혔다. 당장의 가장 큰 생계인 ‘게스트하우스’가 큰 타격을 입었으니 하루하루가 막막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나의 고집이 엄마에게는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았으리라. 어떤 날은 회유, 어떤 날은 협박, 어떤 날은 눈물로 호소하셨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하루에 1분 남짓 얼굴 보며 통화하는 일상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엄마, 사실은 나 아침마다 7시에 일어나서 밥 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남들이 싼 똥 묻은 변기 닦는 것도 고역이고 매일 빨래해도 산더미 같은 쌓이는 수건이 안 말라서 한 보따리 씩이고 지고 건조기 돌리러 코인세탁방 가는 것도 너무 창피해. 


 한 번씩 말도 안 되는 진상손님이 와서 시비 걸 때마다 머리에 꿀밤 한 대씩 쥐어박고 싶고 소금 뿌리면서 쫓아내고 싶을 때도 엄청 많아. 


 살이 20kg 나 쪄서 몸이 둔해지고 그렇게 변한 외모만 보고 가끔 무시하는 사람들도 생겨서 짜증 나. 여기 와서 장사하느라고 연애 많이 못하는 것도 서글프고 한국에 그냥 있었으면 내가 제 나이에 결혼했을까 라는 생각도 가끔 해.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내가 진짜 누구인지 알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인간관계에 지치고 외롭기도 해. 매일매일 엄마랑 아빠, 그리도 동생, 친구들도 너무 보고 싶어. 이전 직장 애들이 승진하거나 집 샀다는 소리를 들으면 초조하거나 배 아플 때도 있어. 맨날 여행 다니고 새로운 사람들 만나고 맛있는 거 먹고 술 마시고 그야말로 한량처럼 유럽에서 사는 내가 부럽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 쉽게도 판단한다고 삐뚤어진 생각도 한다. 


 여기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냥 난 이방인으로 살다 죽겠구나 싶은 날도 많아. 근데 난 이런 말 절대 못해! 우리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보내줬고 믿고 지켜봐 주는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엄마, 좀 신기한 게 이렇게 힘든 게 많은데 나 여기서 사는 게 참 행복하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참 좋다, 진짜 행복하다 생각하고 살아. 그런 순간들이 매일매일 있는 게 신기해. 여긴 하늘도 매일 참 예쁘다. 엄마랑 같이 보고 싶어.”


 이 많은 말을 가슴에 담고 있는 나의 눈이 어느새 촉촉해지면 엄마가 넌지시 물어보신다.


“야, 그래서 너 행복하냐?”

“응…”


“그럼 됐다.”


 목소리 끝이 떨리고 어느새 엄마의 눈에도 눈물이 고이지만 오늘도 씩씩하게 그리고 무뚝뚝하게 전화를 끊는다. 나를 이해해 줘서 나를 나로 살게 해 줘서 고마워요. 엄마.






 오늘 엄마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갑자기 이 글이 생각났다.

이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사실 나는 그냥 똑같이 살고 있다. 

피렌체에서 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유유자적... 그렇다면 우리 엄마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많이 달라졌다. 여동생이 아들 둘을 연달아 낳으면서 나에게 쏟아졌던 모든 관심과 사랑은 조카들에게로 갔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이제는 좀 그립다. 나에게 쏟아지던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 낳았으면 끝까지 사랑해 줘야지! 40년 됐다고 지금 무관심해지는 거야?"


 " 아.. 지랄. 사랑 같은 소리 하네!!!!!!!!!!!"


 엄마의 외마디 외침에서 지침이 느껴졌다.  언제까지 내리사랑일거냐.

순간 퍽! 하고 내 뒤통수를 치는 깨달음. 그 짧은 통화 속 내 넋두리만 하던 세월. 누가 우리 엄마 마음을 알아줬을까. 다 큰 딸이 외국에 나가 애달프게 하더니 이제는 둘째 딸이 자기 가정을 꾸리는 데 엄마가 안 도와주면 안 되는 상황이란다. 


 우리 순지 여사 인생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늘도 짧은 통화였다. 이제는 자기 얼굴도 잘 보여주지 않는다. 

1분 이상만 통화해도 고이는 눈물에 메어가는 목소리... 아직도 자식들 걱정뿐인 엄마는 천장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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