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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렌체장탁 Jan 03. 2024

39살 12월, 금주를 결심하다.

말도 안 된다고 나도 생각은 하지만.

 술, 내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해온 내 단짝 친구.


 누구보다 사랑했고 날 많이 아프게 했고 그럼에도 놓지 못했고 늘 생각나는 내 친구. 한때는 이 친구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도 해야 했고 부모자식 간의 연을 끊을 뻔도 했으며 잘 쌓아가던 커리어나 결심도 한순간에 무너지게 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또 이 녀석이 위로해 줬으니까. 그렇게나 소중하고 어떤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던 그 존재를 이제 잠시 떠나보내려 한다. 숙취에 시달리며 몇 번인지 세지도 못할 만큼 토하다가 지쳐 '아, 내가 다시 술 마시면 개다.'라고 내뱉는 그런 결심이 아니라 진짜 진지하게 술 좀 끊어보려고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제는 술이 맛이 없다.


 나는 누구보다 '알코올예찬론자'이자 '애주가'였다. 신기하게도 처음 마셔본 소주는 처음부터 내 혀에 달았다. 다른 친구들은 이게 쓰다는데 왜 나는 이게 달지 싶었는데 게다가 아무리 마셔도 잘 취하지 않았다. 맥주는 또 어떤가. 500리터 맥주가 한 번의 쉼도 없이 꿀떡꿀떡 잘만 넘어갔다. 목이 따갑다느니 트림이 난다느니 그런 건 내 식도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목구멍 가득 넘어가는 탄산과 알코올의 시원함이 목을 지나 가슴까지 뻥 뚫어주는 것 같았고 마시고 나면 혀에 남는 구수한 향과 맛까지 다른 어떤 음료와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 둘이 섞으면... 게임 끝이다. 배도 안 부르고 아주 끝도 없이 들어간다.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대학교에 들어가니 전공선택 수업 중에 '주류학'과 '와인학개론'이 있었다. 수능 성적에 맞추어 선택했던 학교와 전공이었는데 이건 운명인가 싶었다. 술에 대해 배우고 나니 술의 세계는 한층 더 넓어졌다. 소주와 맥주만으로도 충분히 극락이었는데 그런 내 세계에 데낄라, 위스키, 와인, 고량주 등이 침투했다. 교수님들도 잘 배우고 잘 마시는 내가 예뻤던 지 수업 끝나고 몇몇 동기들과 함께 그 나이에 맛볼 수 없는 진기한 술들을 사주시고는 했다. 술을 마시고 있는데 공부를 하는 거라니 아무래도 내 인생의 황금기는 그때였던 걸까.


 20대에는 술 먹고 실수도 많이 하고 정신을 못 차릴정도로 과음을 하기도 했다. 30대에도 물론 그런 적이 더러 있었지만 이탈리아에 오고나서부터 그런 술버릇이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부터 거의 대부분의 술자리는 손님들과 함께하게 되었는데 그런 자리에서 내가 취해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좋게 하되 취하지는 않아야 했고 또 술자리가 끝나면 다 정리하고 다음날 아침 7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해야 하는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과음하는 습관이 고쳐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로 마시는 주종이 와인으로 바뀐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와인은 벌컥벌컥 들이켜는 술이 아닌 데다가 이탈리아 사람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하다 보니 이들의 목적은 음주라기보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와인이나 맥주 한 잔을 손에 들고 3시간은 기본으로 떠들 수 있는 자들이 이탈리아인이다. 그런 문화 속에 살아가다 보니 술도 천천히 마시게 되었다. 아직도 어릴 적 친구들과 편한 자리에서 마시거나 하면 과음을 하기도 하지만 취할 때까지 마시는 빈도수나 술을 마시는 횟수 자체가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혼술도 하지 않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약속이 없더라도 집에 와서 혼자 맥주 몇 캔 마시거나 와인 한 병 마시는 게 그렇게 행복이었는데 이탈리아에 살면서부터 거의 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하는 곳도 집, 노는 곳도 집이다 보니 집에서 마시는 술이 맛이 없다. 나가서도 술집이나 레스토랑보다는 야외에서 마실 기회가 있어야만 신이 났다. 그나마 여러 명이 마시면 집에서도 마시지만 혼자 마시는 술은 영 맛도 재미도 없다.


문득 친구 중 아무개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인생에서 마실 수 있는 알코올의 총량이 정해져 있대."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무슨 개소리냐고 코웃음 치면서 나는 관짝에도 술병 들고 들어갈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차츰 그 말이 내 가슴속 깊이 새겨지듯 들어왔다. 그간 웬만한 술자리에서 남들의 두 배 이상 마셔대더니 벌써 그 총량이 다해가나 보다 싶었다.


 술을 마셔도 별로 흥이 나지도 않고 배만 부르고 다음날 체력만 축 나는 것이 영 술맛이 안 난다. 이건 뭐랄까. 나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내 인맥의 절반은 술 마시고 신나서 노는 나를 좋아한다. 나도 그런 나를 좋아했다. 그런데 알코올 없는 나라니. 매력이 훅 떨어지는 기분이다.


 그럼에도 곧 마흔이 되는 나는 금주를 결심했다. (비록 만 나이는 38세지만 거의 평생 내년이 마흔이 되는지 알고 살았던 자로서 2024년에 장렬히 마흔을 맞이하기로 했다.) 하고 싶은 일 다 해보고 살려고 노력한다는 게 이 나이 먹도록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인 나이다. 그 말을 반대로 하면 하기 싫은 건 안 한다는 소리다. 금주 결심 역시 그런 맥락이다. 이제 술을 마시는 게 별로 재미가 없으니 당분간 안 해보겠다는 거다. 금방 후회하고 미친 듯 그리워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냥 관성으로 마시던 거니 마시자 하던 알코올습관을 조금 신경 써서 별로 안 당기니 마시지 말아 보자!로 시도는 해보고 싶다.


 지금 귀에 들리고 있다.  너희들의 비웃음 소리가...


"개가 똥을 끊지."


그렇지만 기대되지 않는가. 알코올 없는 나의 인생 네 번째 라운드는 어떤 모습일지.


비하인드.

사실 12월에 연말분위기 타면서 미친 듯이 마시고 먹고 놀아제낄려고 했는데 나가자마자 술 먹고 핸드폰 털려서 현타 온 자의 길고 긴 넋두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래도 금주는 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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