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확신의 전염병

바보의 벽 1편

by 장승희

어릴 때부터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질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여름을 좋아하는 걸까, 겨울을 좋아하는 걸까. 질문 자체는 유치할 정도로 단순한데, 이상하게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확신에 찬 답을 내놓지 못한다.

처음 이 의문이 시작된 건 대학 시절, 텅 빈 버스 정류장에서였다. 칼바람이 몰아치던 한겨울이었는데, 귀가 시리고 코끝이 아려올 정도로 추웠다. 손끝이 저릿해질 때쯤 나는 몸을 웅크리며 생각했다. ‘나는 여름이 좋다.’ 여름은 더우면 에어컨 아래로 숨거나 얼음물을 들이켜면 그만이다. 하지만 겨울의 추위는 골수까지 파고들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덜덜 떨며 버티는 일뿐인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겨울을 너무 싫었다.

그런데 계절이 바뀌고 뙤약볕 아래 다시 서면, 똑같은 내가 똑같은 질문에 전혀 다른 대답을 한다. 이번엔 여름밤의 모기 때문이다. 단 한 마리의 모기가 잠을 깨우고 가려움이 온몸을 지배하는 순간, 수면의 질은 바닥을 치고 내일의 일상이 통째로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면 입 밖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겨울에는 모기는 없잖아, 추운 건 옷 좀 더 껴 입고, 따듯한 곳에 들어가면 되지만, 모기는 정말…’

우습지 않은가. 똑같은 자아를 가진 한 사람이, 단지 기온이 바뀌고 모기가 나타났다는 신체적 상황의 변화만으로 인생의 선호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꾼다. 나는 본래 결론을 명확히 내리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한 번 답을 정해놓아야 뇌를 덜 쓰고 오판도 줄이며 효율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름과 겨울의 문제는 도무지 정답의 도장을 찍을 수가 없다. 여기서부터 묘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내가 지금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언제 바뀔지도 모르는 모래성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정말 알고는 있는 걸까?

이 막막한 질문 앞에 서면 자연스레 소크라테스의 얼굴이 떠오른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의 말은 이제 흔한 자기 계발서의 문구처럼 소비되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형벌에 가까운 요구다. 내가 모르는 영역을 내가 인지해야 한다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델포이의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지목했다. 소크라테스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어 당대 똑똑하다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나눴다. 정치가, 시인, 장인들을 만나 치열하게 문답한 끝에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안다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만큼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가 그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지혜로웠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소크라테스는 왜 굳이 모른다고 했을까. 지식이 부족해서였을까, 아니면 겸손의 미덕을 보이려 했던 걸까. 내가 이해한 소크라테스의 ‘모름’은 훨씬 더 실존적인 고백이다. 그는 정보의 부재를 말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수시로 변하는지, 그 변화하는 주체가 받아들이는 정보가 얼마나 왜곡되기 쉬운지를 간파했던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정보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여름의 정의, 태양의 고도, 물의 화학적 성질은 고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정보를 받아들이는 ‘나’는 유동적이다. 10km를 숨 가쁘게 뛰고 난 뒤 마시는 물 한 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마움이지만, 배가 불러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을 때 마시는 물은 고문에 가깝다.

요로 다케시가 말한 ‘바보의 벽’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세워진다. 지식이 부족해서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미 안다’는 확신이 견고한 벽이 되어, 변화하는 자신과 타인의 경험을 계산에 넣지 못할 때 우리는 바보가 된다.

우리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뇌는 입력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그 그림에는 나의 지식뿐 아니라 감정, 편견,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체 상태’가 짙게 투영된다.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남녀 대학생들에게 출산 영상을 보여주었더니, 남학생들은 대체로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 새로울 게 없다”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면 여학생들은 “몰랐던 디테일을 많이 알게 됐다”며 몰입했다. 정보는 같은데 왜 반응은 갈렸을까. 여학생들에게 출산은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신체적 사건’이었고, 남학생들에게는 그저 ‘외부에서 일어나는 정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 산부인과 분만실에 누워 있는 임산부에게 그 영상을 보여준다면, 그가 발견하는 새로운 앎의 깊이는 앞선 학생들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나의 경험도 비슷하다. 고등학교 시절 오토바이가 너무 사고 싶었던 적이 있다. 그전까지 오토바이는 길거리에 늘 존재하는 배경에 불과했다. 그런데 ‘사야겠다’고 결심한 그날부터 세상은 오토바이 천지로 변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찰나에도 오토바이의 기종과 엔진 소리, 타이어의 마모 상태까지 눈에 들어왔다.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라 나의 관심과 신체적 필요가 내 눈앞의 해상도를 바꿔버린 것이다.

결국 앎이란 선택적이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을 크게 확대하고, 귀찮은 것은 과감히 지운다. 내 몸이 변하고 상황이 바뀌면, 어제까지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이 오늘 비루한 오답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은 고정된 덩어리가 아니라, 내가 변하는 속도만큼 수시로 흔들리는 파동에 가깝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자신의 생각과 ‘지금 알고 있는 것’에 너무나 쉽게 종지부를 찍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더 놀라운 것은, 나중에 자신의 앎이 틀렸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도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각이 바뀌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진화다. 진짜 문제는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차단한 채 타인을 단죄하고, 그 확신이 무너졌을 때조차 아무런 감각이 없는 태도다.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 정치인들은 늘 자신이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를 떠든다.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고 지지하는 대중들도 그들의 확신이 전염되어 각자의 확신이 온 세상에 전염병처럼 번저 나간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이 지금 알고 있는 것이 과연 10년 뒤의 당신에게도 유효한 진리인가. 당신이 늙고, 병들고, 혹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위치에 놓였을 때도 그 확신은 변함없을 것인가. 아마 상당 부분은 바뀔 것이다. 앎의 본질은 객관적 정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몸과 감각이 빚어낸 ‘해석’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만연한 세대 간, 성별 간의 갈등을 보면 ‘바보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 실감한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인생을 살아볼 수 없다. 나이가 들어본 적 없는 청년이 노인의 보수성을 꼰대로 치부하고, 지금 시대의 취업 준비생으로 살아본 적 없는 기성세대가 “요즘 애들은 노력이 부족하다”라고 일갈한다.

남자로 살아본 적 없는 이가 남자의 고통을, 여자로 살아본 적 없는 이가 여자의 공포를 텍스트 몇 줄로 ‘이해했다’고 말하는 순간, 오해는 시작된다. 몸이 통과하지 않은 정보, 피부를 적시지 않은 경험을 안다고 생각하는 건 좀 위험하다. 심지어 신체가 경험했던 앎조차도 신체가 변화할 때마다 새롭게 재 조립되니 안다라는 자신감은 여간해서는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현재 상태의 나’가 잠정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겸손한 전제가 필요하다. 모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내 확신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나의 확신만이 아니다. 타인이 내보이는 '안다'는 확신 역시 각자의 '바보의 벽' 안에서 만들어진 파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정답이 나의 삶을 규정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한계 내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인지, 그들 스스로가 변했을 때도 그 앎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질문하며 한 걸음 물러나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요즘 유행하는 과학자들이나 역사 스토리텔러들,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는 언론사나 유튜버들이 쏟아내는 '팩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확신이 아무리 견고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 절대적 정보의 전달이 아니다. 그 정보를 그들이 인식한 대로, 즉 그들만의 필터를 거쳐 뱉어내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 인식이라는 것은 현재의 상태, 편견, 감정, 심지어 그날의 신체 컨디션에 따라 언제든 일그러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