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1)

행복을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풀어낸 <행복의 기원>

by 도은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님이 10여 년 전 출간하신 <행복의 기원>. 꾸준히 읽혀 10주년 기념 개정판이 출간되기까지 했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라는 철학적 목적론의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을 벗어나 '인간은 살기 위해 행복을 느낀다.'라는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행복이란 개념을 풀어낸 책이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것이다. 난 항상 행복이란 것을 목적론적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도대체 이 책이 뭘 말하는 걸까 읽을수록 궁금해져 집중해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행복과 진화론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생각했다.


'과학책 버전'의 행복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관 또한 다분히 목적론적이다. 그에게 삶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추구하며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때 그는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생각은 한 철학자가 가졌던 개인적인 견해일 뿐,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님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구절을 읽고 살짝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난 항상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관점에서 행복을 추구해 왔고 그것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행복을 위해 살고 행복을 위해 먹고 행복을 위해 일하고.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생긴 견해이며,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인간도 결국 동물이고 동물의 최대 관심사는 '생존'과 '번식'이다.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일 뿐인 것이다. 인간이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기도 전에 말이다.

진화론은 다윈이라는 한 천재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견해가 아니다. 사실이다.
진화론 코스에서 보게 되는 행복은... 생존, 욕정, 번식과 같은 본능들과 뒤범벅된 매우 원초적인 모습이다. 행복의 실체에 더 가깝지만, 여전히 학계에서는 외면받고 있는 얼굴이다.

철학적으로 풀어낸 행복에서 벗어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행복에 대해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왔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뭔지 모를 공허함과 답답함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생겼다. 행복이란 것이 결국 인간의 본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라면 그 행복을 위해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밤새워 괴로워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피카소 효과


피카소가 여성편력이 심했던 것은 아주 유명한 사실이다. 그는 한참 동안 창작활동을 하지 않다가도 새로운 여성을 만날 때면 예술적 창의력이 폭발하여 창작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피카소만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유명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피카소는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여성들을 만났을 때 자신의 최대 장점인 예술적 창의성이 최대로 발현된 것이다. 행복이란 개념도 이런 피카소의 창의성과 비슷한 도구라 생각할 수 있다. 피카소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여성들을 만났을 때마다 창의성이 폭발한 것처럼 우리 인간도 생존을 위해 행복이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행복은 삶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 철학자들의 의견이었지만, 사실은 행복 또한 생존에 필요한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마치 피카소의 창의성 같은?


인간은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동물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인간의 최대 목적은 생존이다. 인간의 조상은 생존을 위해 무리 지어 생활하고 사냥을 나가 먹이를 구했으며 외부의 적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했다. 인간이 현대 문명을 접한 것은 인간의 탄생 이래로 몇 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마치 인간은 원래부터 현대 문명에 살았던 것처럼 착각을 한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고귀하며 행복이라는 고차원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고 오만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도 다른 동물들과 다르지 않게 결국 생존이 최대 목적이다. 생존을 위해 행복, 즉 다양한 '쾌'의 느낌을 느끼며 그 좋은 감정을 또다시 느끼기 위해 또 다음 미션을 깨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여러 조건들, 이를테면 돈, 건강, 종교, 학력, 지능, 성별, 나이 등을 다 고려해도 행복의 개인차 중 약 10~15퍼센트 정도밖에 예측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지속성이 떨어지며 한번 경험한 느낌은 다음번에 비슷한 강도의 느낌은 '쾌'의 강도가 약해진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은 '적응'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일정한 수준의 돈을 가지게 되면 그 이상으로 돈이 많아져도 더 이상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돈이 0인 사람은 10의 돈을 갖게 되면 엄청나게 기분이 좋겠지만 돈이 100이 있는 사람이 10을 가지게 되면 그저 그럴 것이다. 즉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아주 빈곤한 수준이 아니라면 돈은 행복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최근 연구들에 의하면 돈은 소소한 즐거움을 마비시키는 특별한 '효능'까지 있다. 돈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그래서 초콜릿 같은 시시한 것에 마음을 두지 않게 하고, 이런 자극을 음미하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심지어 사람이라는 자극에도 관심을 덜 갖게 한다. 돈을 생각할수록 카페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덜하고, 어려움을 당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사양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위의 글귀가 우리 현대 한국인들의 우울감을 높여주는 가장 큰 원인 아닐까. 한국은 가히 천민자본주의를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돈이면 다 되는 자본만능주의에 빠져 소소한 것, 진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의 빈도수를 낮추고 결국은 전체적인 '쾌', 즉 행복감을 낮추어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점점 몰아넣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은 '적응'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큰 즐거움도 계속되면 적응을 하게 되고 전보다 더 큰 '쾌'를 추구하게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돈이던 승진이던 어떠한 성취던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마지막은 이전보다 더 큰 '쾌'를 추구하게 되어있다. 재벌의 자재들이 괜히 마약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복권 같은 큰 사건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초콜릿 같은 소소한 즐거움의 가랑비에 젖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종 목적이라기보다는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소소한 것들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소소하게 즐거워할 수 있는 것들을 여러 개 찾아놓고 다양하게 일상생활 속에서 즐겨 행복의 빈도수를 높이는 것이 인간이 제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일상 속 소소함이 모여 큰 행복이 된다는 것이 뜬구름 잡는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닌 과학적으로 밝혀진 사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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