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두시 May 23. 2023

그림을 그린다는 것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

어릴 적 기억 중에 아직도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다.

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몇몇 연예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지나가다 우연히 그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80년대 후반, 초등학생이던 어느 날, 대학 가요제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담다디>의 가수 이상은을 보았다. 그녀는 아파트 상가 계단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연예인을 봐서도 그랬지만 책상 앞이 아닌 밖에 나와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딘가로 떠나 풍경을 그리는 사생대회를 가기 시작한 건 그녀를 마주친 이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책상 밖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내겐 전혀 없었다.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 곳이나 털썩 앉아서, 뭔가에 몰두하는 사람의 모습이 연예인이라는 존재보다도 더 신비롭고 멋있게 보였다. 사실, 상가 계단 앞에서 보이는 건 아파트 건물 밑동뿐이었는데 무엇을 그리는 것이었을까 의아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책상 위에 구몬 학습지를 펼쳐두고, 한쪽에는 연습장을 펼쳐 그림을 그리곤 했다. 배철수의 음악 캠프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놓고,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팝송을 들으며 순정 만화 스타일의 여자를 그렸었다. 특별히 재능이 있다거나 그리기를 즐기는 아이가 아니었기에 그림은 내 유년기에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림은 그저 잠시 끄적이던 낙서와도 비슷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나는 엄마가 되었다. 아이랑 어떻게 놀아줘야 할지 몰라서 그림책을 자주 읽어주었다. 자연스럽게 그림이 내게 다가왔고, 그림과 친해지게 되었다. 나도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런던의 한 갤러리에서 그림 그리기 수업을 들었다. 그때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수업을 같이 들은 학생들의 영향으로 인스타를 개설했고, 이후에는 뜨문뜨문 그림을 그려 올렸다. 그리고 이듬해 팬데믹이 왔다. 영국 정부의 지시로 격리 생활이 이어지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 시기에 나는 태블릿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다음 해에도 팬데믹이 이어져서 그림으로 일상의 지루함을 달랬다. 자주는 아니지만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신문 기사의 인물 사진을 보고 따라 그리기도 하고, 영화나 일상을 통해 영감을 받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림을 그리기 전 이미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림도 글과 마찬가지로 몰입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림과 글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분명히 달랐다. 그림은 글이 다 전달하지 못하는 내 감정이나 느낌을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말처럼 글도 구구절절 길게 쓰는 걸 싫어하는 나에게 어쩌면 그림은 나를 표현하기 더 적합한 매체일지도 모르겠다. 글이 문단이라면 그림은 주제문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캔버스에 내가 창조한 세계가 한눈에 펼쳐지니깐 그리면서 신기하고 재미있다. 캔버스 위에는 내가 원하는 인물과 풍경, 소품과 도구를 골라 연출해 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어 통제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것은 팬데믹으로 대부분을 통제할 수 없던 현실에 돌파구를 마련해 줬던 것 같다.   

ⓒ새벽두시, @seohwadoodles

팬데믹이 잠잠해진 작년부터 대면 그림 수업에 다시 참석하게 되었다. 한 번은 수업 과제로 길거리 인물 스케치가 있었다. 숙제를 위해 지하철 역의 행인들, 내 앞자리에 앉은 지하철 승객들을 평소보다 유심히 관찰해야 했다. 짧은 시간 인물의 특징을 캐치해야 하므로 내겐 조금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스쳐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 명 한 명 각자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깨달았다. 어쩜 한 명도 비슷한 얼굴이 없고 각자 개성이 있었다. 그때 평소에는 무관심히 지나쳤던 사람들이 내 마음 안으로 들어왔다. 철저히 타인인 그들 하나하나가 갑자기 사랑스럽게 보였다. 세상이 뭔가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문득, 하늘에서 그런 우리를 내려다보는 신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림을 그리며 주변을, 사물을, 사람을 관찰하고 그 안에 담긴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 그렇기에 매번 두렵지만 용기 내어 새 캔버스를 연다. 서투르지만 그림을 그리며 기쁨과 감사함을 느낀다.      


아름다운 것-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아름다움 안에는 심연이 있고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은 이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조용한 날들의 기록>, 김주영

                 

             

매거진의 이전글 어린 연주자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