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남편의 여동생 집에 다녀왔다.
조카의 7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족끼리 조촐한 파티를 하기 위한 자리였던 것이다.
가족들에게 서운함이 많은 남편은 길을 나설 때부터 무척 예민해져 있었다.
남편의 가족은 모두 영국에 있지만 심적으로는 한국보다도 더 멀리에 있는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이해와 공감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되는데,
시댁 식구들과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남편과 결혼 후 한국에서 7년을 살다가 2017년 영국으로 돌아왔다.
10여 년 전 내가 영국을 떠날 당시에 나는 우울증을 겪고 있었으므로,
다시 돌아와 영국에 정착하는 것이 내겐 도전 과제와도 같았다.
혹시라도 지난번처럼 우울증을 겪을까 봐 돌아와서의 처음 1년은 몹시 불안하고 두려웠다.
남편도 나의 그런 과거를 알기에 한국의 가족을 떠나 다시 영국 생활을 적응해야 하는 나를 염려했다.
남편은 자신의 가족이 도움은 못주더라도 우리가 영국에 돌아와 고군분투하는 상황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길 바랬으나 그렇게 되지 않자 좌절감과 함께 상실감을 느낀 것 같다.
나의 이런 상황을 영국에 산지 10년 가까이 된 한 외국인 친구에게 토로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도 영국 사람들은 가족의 끈끈함이 없는 것 같다며 공감했다.
물론 안 그런 영국 가족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공동체 의식보다는 개인주의의 성향이 우세한 것 같다.
시댁 식구들을 만나면 겉으로 보기엔 그저 아무 일이 없었던 것 같이 보이지만,
항상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보면 어떤 허무함과 함께 응어리의 부피는 점점 커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서운한 감정은 옷에 일은 보푸라기처럼 불편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족이라는 상표만 없다면 보푸라기 인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사도 되겠지만,
그게 아니니 이런 반복되는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는지 무척 고민이 되었다.
답답하고 고뇌에 쌓인 이 순간에 한국에 있는 친구와 우연히 통화를 하게 되었다.
전화기 너머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해준 친구 덕분에 나의 마음은 평화를 되찾았다.
영국에 마음을 주고 기댈만한 가족은 없지만, 내게는 친구라는 이름의 가족이 있어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