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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Mar 18. 2019

산책길에서

요즘은 아침에 일어날 때 몸이 영 무겁다.

불혹의 나이 때문인지 영국 날씨가 주로 저기압의 영향을 받아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안 되겠다 싶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 앞 공원에 산책을 나섰는데 지난 주말에 있던 일이 생각났다.


아들반의 친한 친구 중 에콰도르에서 온 H가 있다.

아빠가 영국에 있는 에콰도르 대사관에 발령받아 온 것 같은데 H의 엄마는 영어를 해도 너무 못해서 항상 남편에게 모든 걸 의지하고 있다. 영국의 어색한 학부모 분위기 속에서 영어까지 못하니 그녀는 학부모들과도 어울리기 쉽지 않다. 의사소통이 안되니 아들 친구 생일 파티 때에도 항상 남편과 같이 다니고 어딜 가든지 남편이 있어야 한다.  


그러던 그녀가 이제 임신 7개월 정도 되었는데 남편은 최근에 혼자 에콰도르에 갔다.

사실은 세 식구가 다 가려고 했는데 2주 이상 결석하는걸 교장이 허락하지 않자 아내와 임신한 아이는 두고 남편만 혼자 떠났다.

그녀가 남편 없이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잘 알기에 나는 그녀가 남편이 없는 3주간 잘 지낼지 조금 염려가 되었다. 임신한 몸에 5살 아들까지 돌봐야 하니 힘들 것 같아서 언제 같이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러다가 이번 주말에 한번 만날까 하고 연락을 해보았더니 몸이 좀 안 좋다며 얼굴에 두드러기 같은 게 빨갛게 일어났고 열감이 있다고 했다.

나는 임신한 그녀가 걱정이 되어서 응급 의료시 연락하는 111에 전화를 해보라고 하였다. 통역하는 사람이 있으니 괜찮다고 해보라고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과 연결이 되었 증상을 듣더니 응급실에 예약을 해주었다고 한다.

토요일 저녁 8시에 응급실에 예약이 되어있다고 하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보호자도 없고 응급실이면 오래 걸릴 수도 있는데 아들은 어떻게 할 것이며 병원 접수 등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풍진이나 홍역 같은 임산부에게 치명적인 병이 아니기를 바라며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그녀의 얼굴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즉, 홍역과 같은 심각한 증상은 아닌 것 같다는 뜻이었다. 정작 본인은 아들과 웃기도 하고 여유를 보여 내가 환자인 본인보다 더 그녀의 증세에 대해 걱정을 하고 유난을 떠는 것 같았다.   

3시간을 기다려 밤 11시가 다 되어가도 그녀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고 뒤늦게서 의사가 출석을 부르듯이 환자의 이름을 쭈욱 불러보았는데, 그녀의 이름은 리스트의 가장 마지막에 있었다. 출석을 부른 의사가 사라진 후 두 명의 환자가 드디어 의사를 만나러 가는데 리스트의 이름 순서대로 의사를 만나는 것 같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리셉션에 물어보니 4시간은 더 기다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후 의사를 만나면 증세에 따라 치료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 늦은 시각에 약속했던 스페인어 통역이 전화를 받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의사와 그녀 사이에 스페인어 전화 통역이 없으면 이제까지의 기다림도 다 헛수고가 될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임산부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기다리게 한 것 보니 너의 증상이 위급하진 않은 것 같다. 어린 아들도 자야 할 텐데 계속 기다리는 것은 무리일 것 같다. 게다가 새벽시간에는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 하는데 괜찮겠냐며 상황을 설명했더니 그녀는 집에 가고 싶다고 하였다. 다행히 그녀의 병원 예약시간까지 도착하기 빠듯한 나를 병원에 데려다준 남편과 아들이 내가 집에 돌아가라고 했는데도 차 안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와 아들을 차로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주었다.  필요하면 그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부터 응급실에 다시 가보라고 그녀에게 전했지만 그녀는 기다리기 싫어서 월요일에 동네 GP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약속시간보다 항상 1시간 이상 늦게 나타나고, 임신한 몸이 불편하여 의료 상담을 받아야 하는데도 걱정도 안 되는지 늦게 연락을 해서 저녁에서야 응급실에 가야 하는 상황이 되게 하는 사람. 느긋한 건지 무지한 건지 모르겠는 이런 성격은 에콰도르의 국민성인가 모르겠다. 그리고 구글 번역기를 돌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못하는 그녀를 두고 에콰도르에 3주간 가있는 남편도 도무지 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일요일도 월요일인 오늘도 그녀가 괜찮은지 연락을 해보았는데 오늘은 훨씬 더 나아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오늘 남편과 함께 친정엄마가 온다고 했다. 얼마 전 새로 사용한 크림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고 덧붙이는 그녀의 얘기를 들으니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이었나 싶기도 하고 뭔가 기분이 허무하기도 했다.

그래서 하나의 해프닝 같은 걸 겪고 난 후 느껴지는 애매모호한 마음, 남에 의해 야기된 복잡한 심정을 달래러 겸사겸사 산책길을 나섰던 것이다.



산책길에서는 복잡한 마음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공원에 은하수를 만들어놓은 꽃길도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새들이 나이가 가장 많은 나무에 앉아 제각각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나무 밑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니 둥지 안 어린 새들의 재잘거림도 들렸다. 다시 공원을 돌아 집으로 가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기억 때문인지 몰라도 축축하게 춥고 흐린 하늘 가득한 영국에 있는 것이 그토록 싫었는데,

아무리 해도 나는 영원히 변방의 이방인일 텐데 하며 남의 나라에 있는 게 두려웠었는데,

알고 보니 영국에서 이렇게 산책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이런 생활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삶이 아닌가 싶다. 이제는 나도 H를 도왔던 것처럼 남을 도울 여력이 있고, 공원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자주 마주치는 이웃들에게도 인사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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