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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Feb 14. 2020

설거지하다 속이 뻥 뚫리게 한 영화

영화 <레이디 맥베스>

지난 주말에는 집을 치워도 정리가 안 되는 것 같고, 나 혼자만 집안일을 다하는 것 같은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이 답답했다. 알고 보면 자유로운 영혼인 나는 아내와 엄마 노릇하는 게 버거울 때가 가끔( 아니 자주) 있는데, 그때도 그런 마음이 들어선 날이었다. 내가 잔소리하기 전에 남편과 아들이 알아서 자기 주변을 정리하는 날은 과연 언제쯤 올까..? 그들은 왜 그들이 쓴 물건을 제자리에 놓지 못하는 것일까? 정리 전문가 윤선현 씨가 정리 정돈이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로 언급한 것처럼, 정리정돈 의지가 있는 내가 우리 집에서 제일 힘이 없는 존재라서 우리 집이 이 지경이 된 것인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윽고 나는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땐 영화를 봐야 한다.

집안일을 하기 싫은 내 맘을 달래기 위해 종종 쓰는 비법 아닌 비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집안일을 하면서 유튜브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하기 싫은 노동을 하는 시간이 그나마 덜 괴롭게 된다. 그러나 이번엔 유버들이 떠드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본격적으로 설거지를 하기 전에 나는 싱크대 위 선반 위에 태블릿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BBC 방송의 다시 보기 프로그램인 BBC iplayer를 이용해 여배우의 연기가 호평을 받았다는 영화 <레이디 맥베스 (2016년)>를 클릭했다.


가난한 집안의 여자 주인공 캐서린은 돈 많은 늙은 지주와 결혼식을 올린다. 일종의 계약관계가 전제된 결혼이라지만 그녀의 결혼 생활은 황량한 사막과 같다. 캐서린은 남편에게 종속되어 하루하루가 답답한 나날을 보낸다. 영화 속에서  그녀 큰 저택 안에 떠도는 외로운 섬처럼 보다.               

나는 기분 전환은 커녕 화가 나서 다른 영화로 갈아타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캐서린의 남편이 장기간 집을 비우게 되고, 그녀는 그런 속박에서 다행히 조금 멀어지게 된다.


남편이 사라지자, 캐서린은 감옥 같은 저택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꽉 쪼이는 코르셋 드레스와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 대신, 느슨한 복장과 길게 풀어헤친 머리를 휘날리며 나와 광활한 들판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바다가 훤히 펼쳐져 보이는 들판 위에 서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신선한 바람의 감촉을 충분히 만끽한다. 경제적 대가를 얻은 계약과도 같은 결혼 이후, 그녀가 처음으로 한 자유로운 행동이었다. 캐서린은 이제야 원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신선한 바깥공기를 마시게 되었다.

이 장면을 보 내속이 후련하게 뻥 뚫렸다. 마치 막혀있던 수도꼭지가 콸콸콸 흐르는 것 같았다. 광활한 들판 위에서 바다를 보며 온 세상을 느꼈을 캐서린을 생각하니, 내 마음도 벅차올랐다. 내가 가졌던 답답했던 마음도 어느새 그렇게 증발되었다. 

그런데 자유의 달콤함이 너무 강렬했던 탓인가? 캐서린은  어느새 본능을 억누르지 못하고, 하인 세바스찬과 눈이 맞는다. 열정적인 그들의 사랑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급기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위험해진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한국에서 장기 공연을 했던 연극 <레이디 맥베스>와는 다른 내용이다. 러시아 문학 <무첸스크 군의 맥베스 부인> 각색하여 다른 결말로 마무리되는 작품이다.

화 초반에 남편의 통제를 받았던 캐서린은 사건이 전개되면서 점차 자신의 운명의 직접적인 통치자가 된다. 그래서캐서린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처럼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모두 제거해버린다. 인간적인 따뜻함이 있음에도 어느 순간 물불 안 가리는 냉혈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캐서린을 보며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씨가 생각났다. 그녀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명백히 잘못되었지만 그럼에도 관객에게 어떤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연기도 훌륭하지만 연출적으로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잘 만들어서 영화에 몰입하며 볼 수 있었다.

영화의 몇몇 장면은 장면의 구도 때문인지 생생한 긴장감 때문인지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였다. 특히 캐서린이 식사를 하는 다이닝 룸에서 벌어지는 장면이나, 외부인이 방문해 캐서린과 대화를 나누는 공간인 응접실 신이 그러했다.

알고 보니 이 영화의 감독 윌리엄 올드 로이드는 영화에 발을 들이기 전에 런던의 유명한 연극무대인 영빅 극장(Young Vic Theatre)에 상주했던 연출가였을 뿐만 아니라 해외 여러 곳에서 연극 및 오페라를 연출해왔다. 아마도 공연계에서 연출력을 인정받고 충분한 연출 경험이 있어 영화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하고 싶어 한 것 같다.

윌리엄 올드 로이드 감독은 그간 공연계에서 인정받아온  명성에 걸맞게  자신의 첫 영화 <레이디 맥베스>로 성공적인 데뷔를 하게 된다. 이 영화로 토론토 국제 영화제를 비롯한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서 흔치 않은 별 5개의 평점을 받아 수작임을 증명했다.

또한, 이 감독은 연극계에서는 유럽 고전을 현대식으로 각색하는 걸로 정평이 난 잔뼈 굵은 연출가였다. 그래서인지 영화 <레이디 맥베스>의 배경은 고전이지만 주요 사건이 전개되면서 보이는 영화 속 캐릭터의 모습이 현재 우리가 사는 현를 배경으로 각색되어 재탄생해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워낙 캐서린이라는 캐릭터가 시대극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여성의 캐릭터이고 그녀가 주도하는 스토리의 전개가 뻔하지 않아서인지 이 영화는 내게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친근하고 흥미롭게 캐릭터를 묘사하는 캐서린 역의 플로렌스 퓨의 디테일하고 훌륭한 연기도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렵고 불편한 시아버지가 캐서린이 이미 다 마셔버린 술을 찾을 때, 플로렌스 퓨는 술 취한 모습을 숨기는 능청스러운 모습과 함께 극적 긴장감도 살리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감상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이 영화는 자유에 관한 영화였다.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캐서린이 자신의 자유와 욕망을 지키기 위해 저지른 행동들이 아이러니하게 계속 그녀의 자유를 발목 잡는다.

나는 캐서린이 자기 마음대로 무자비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며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워낙 영화 초반에 그녀의 상황이 말도 안 되게 너무 억눌려있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힘이 없던 여성이 주체적으로 영화의 전체적인 상황을 이끌어 가는 것도 내가 그렇게 느끼게 해 주었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초반 마치 길이 뻥뻥 뚫린 미국 서부의 광활한 도로를 즐겁게 운전하는 것 같다가 마지막에 나도 모르게 무인도에 도착하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느낌의 영화였다. 일상에 지친 여성들에게 자유와 쾌감을 선사하다가 어느 순간 도덕적으로 묘한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재미있는 영화다. 그리고 <레이디 맥베스>는 다음 영화가 기대되는 주목할만한 감독인 윌리엄 올드 로이드를 발견하게 한 주옥같은 영화라고 단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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