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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Apr 29. 2020

태풍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화 < 태풍이 지나가고 >

내 인생에 이렇게 까지 불안했던 적은 없었다.

책이 읽히지 않고 글도 써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대왕문어가 각각의 다리로 나의 생각을 하나씩 낚아채,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순간들이 생겼다.

영국에서 흉흉한 코로나 뉴스가 퍼져가던 3월의 이야기이다.


그때 나는 밀려드는 공포감과 불안을 잊기 위해, 아이가 자는 밤에 영화를 보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 멘털을 붙들려고, BBC의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인 BBC iplayer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왠지 제목이 끌리는 <태풍이 지나가고(After the Storm)>라는 영화를 클릭했다. 그러고 보니, 감독이 <어느 가족(2018)>의 고레에다 히로카즈였다.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어느 가족>으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의 영화는 모두 가족과 관계에 대한 내용이고 <태풍이 지나가고(2016)>도 마찬가지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는 항상 내게 많은 생각이 맴돌게 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나는 블로그에 글을 올리곤 했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는 잔잔하게 내 마음을 물들여놓고, 잠시 나의 막막한 현실을 잊게 하였다.   


<태풍이 지나가고>는 소설가이지만, 지금은 돈 때문에 남의 애정사나 파헤치고 다니는 흥신소 직원 '료타'에 관한 이야기이다. 연금으로 겨우 살아가는 홀어머니의 집에 와서도, 혹시 숨겨져 있는 돈이 없나 뒤지고 다니는 찌질한 아들. 그는 돈이 생기면 복권을 사거나 도박을 해 쉽게 소진해버린다. 그래서 이혼한 전 부인에게 아들의 양육비도 번번이 주지 못한다.


료타는 비록 돈도 없고 초라한 아버지이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한없이 커서 어느 부자와도 비교할 수 없다.

오랜만에 아들을 만나는 날, 드디어 아들에게 약속한 야구화를 사주기 위해 함께 쇼핑을 간다.

이날을 위해 는 푼돈을 모으느라 많은 애를 썼다. (실은, 흥신소 직원답게 온갖 찌질한 방법을 동원해 모았다.)

이때, 나는 료타의 얼굴에서 이전에 보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생생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물건을 고르는 아들을 흐뭇해하며 설렌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랑 가득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는 아들을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는 이 순간을 고대해왔고, 자신의 존재가 이제야 가치 있게 느껴진다는 듯이 얼굴을 반짝이며 행복해했다.

여기서 료타가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표현한 배우 '아베 히로시'의 명연기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가 너무나 순수하고 투명하게 잘 녹여낸 아버지의 모습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나도 크게 공감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보통 태풍을 위험하고 피해야 하는 현상으로 여기고, 저만의 대피소에서 태풍이 지나가길 기다린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료타와 아들 그리고 전 부인은 함께 거친 비를 뚫고 나가 태풍을 맞이한다. 그리고 예기치 않게 단란한 추억을 만든다.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성공적인 삶으로부터 한참 떨어져 있는 인물로 여겨질 수 있지만, 료타는 태풍이라는 위험 요소를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태풍의 시간을 즐겼다. 이게 그의 단순한 성격 때문인 건지 아니면, 아들과의 한정된 시간으로 인한 절실함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태풍으로 궂은 날씨에 한밤중에 밖으로 나온 아버지와 아들은 놀이터로 향했다. 그들은 태풍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둘만의 소중한 시간을 쌓기 위해 전념한다. 이미 금이 간 관계인 료타의 가족은 태풍이 머무르는 잠시 동안, 견고하고 화목한 여느 가족처럼 보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놀이터에서 료타가 아들에게 사준 복권을 온 가족이 찾으러 다니는 장면이 나에게는 잊히지 않는 기분 좋은 장면이다. 그들이 잃어버린 복권을 찾는 모습은 마치 즐거운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처럼 연출되었다. 그리고 인생에서 행운과 숨바꼭질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했다.    

역설적으로 오묘한 감동을 주는 이 장면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거장으로 인정하게 만든다. 가족이란 이렇게 함께 태풍을 견뎌내며, 그 안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특별한 관계가 아닌가 싶다.  

마지막으로, 료타는 자신의 가족과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진다. 그런데 이때 다시 혼자가 된 료타의 뒷모습이 예전처럼 쓸쓸해 보이지가 않았다. 아버지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료타는 이제부터라도 소설가로서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알 수 없지만 이번에는 왠지 나도 료타에게 믿음이 간다. 그냥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강렬한 햇살이 다시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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