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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두시 May 16. 2021

진심의 노래

루시드 폴 <아직, 있다.>

책의 어떤 구절, 영화의 어떤 장면, 음악의 어떤 리듬이나 가사가 훅 하고 일상의 나를 건드릴 때가 있다. 얼마 전에 나는 우연히 음악을 듣다가 또 그런 경험을 했다. 루시드 폴의 <아직, 있다.>라는 노래였다. 내 마음에 스며드는 기타 선율과 가사에서 결국 눈물이 새어 나왔다.


루시드 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미선이라는 밴드를 통해서였다. 90년대 후반 나는 친오빠가 가지고 있던 인디밴드의 음반들을 많이 들었다. 당시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미선이 등은 소설 <상실의 시대>와 어울리는 젊은 세대의 우울한 감성을 인디 록에 녹아내고 있었다. 그러다 몇 년 후, 나처럼 인디 음악을 좋아하던  한 친구가 루시드폴의 데뷔  앨범 내게 주었다. 멤버들이 군대를 가서 혼자 남겨진 미선이의 보컬리스트 조윤석이 루시드 폴이라는 이름으로 솔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들어보니 미선이와는 많이 다른 결의 음악이었다. 미선이의 음악은 흐린 날 오후에 내리는 비 같은 눅눅한 느낌이 있던 반면, 루시드 폴은 푸른 하늘과 투명한 물이 연상되는 맑은 곡들을 노래하고 있었다. 어떻게 들으면 서정성 가득한 음악을 부르던 80년대 듀오 어떤날의 음악도 떠오르게 했다. 나의 20대 시절은 미선이와 루시드폴과 같은 인디 음악을 들으며 그렇게 흘러갔지만, 30대 때는 결혼과 임신, 출산과 육아로 그런 음악들로부터는 점차 멀어졌었다. 그러다 최근 유튜브를 보게 되면서 과거로부터 온 음악들을 다시 만났다.  


사실 며칠 전부터 한국 생각이 났다. 장롱면허지만 운전 면허증 갱신기간이 지났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고, 갑자기 이빨이 아펐어서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 매년 여름 방학에 아이와 한국에 갔었는데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못 갔다. 그래서인지 한국을 못 간지 꽤 오래된 기분이 들었다. 그냥 가서 가족들 만나고, 맛있는 음식 먹고, 똑같은 머리 색깔을 한 사람들 틈에 섞여있을 때의 그 편안함을 느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인도의 코로나 상황과 자가 격리 등의 이유로 올해 한국에 갈지 아직도 결정을 못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외로운 감정과 함께 왔다. 하지만 한국에 가더라도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친구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외로움에 사무치게 했다. 나에게 의미 있던 한 존재가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직은 힘든 일이라는 걸 다시 깨달았다. 그러다 우연히 <아직, 있다.>라는 노래를 듣게 되었다.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다시 봄이 오기 전

약속 하나만 해주겠니

친구야,

무너지지 말고

살아내 주렴


친구가 내게 보내는 노래 같았다.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친구는 가끔씩 이런 방식으로 내게 나타난다. '나는 아직 있어'라고 내 주위에서 속삭인다. 얼마 전 갔던 바닷가에서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췄을 땐 바다에 떨어진 금빛 햇살이 돌아가신 아빠를 생각나게 했다. 그날 바닷가에서 아빠는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셨다.      


사실 언젠가 <안 느끼한 산문집>을 읽고 나서 내 감정을 드러내는 글은 되도록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브런치 작가가 된 지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진전이 없는 것 같아 그 이유를 혼자 분석해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글쓰기 관련 책들도 몇 권 읽어보았지만 구독자 수처럼 글 실력도 좀체 느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다 <안 느끼한 산문집>을 읽으며 불현듯 깨달았다. '내 글이 감성적인 면이 있어서 독자들이 느끼하다고 안 좋아했을 수도 있겠구나'. '후져 보였겠구나'. 이후 글쓰기에 좀 더 신중해졌다. 글을 잘 쓰고 싶지만 글쓰기가 참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글 쓰기가 부담스러워졌다. 그런데 이번에 루시드폴의 <아직, 있다.> 노래를 들으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감성 가득한 이 노래는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주었다. 물론 음악에서 감성은 빠질 수가 없고 대중도 관대한 아량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주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감성적인 글이 안 좋은 글일까? 나는 느끼한 글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친구의 발인 몇 시간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 쓴 내 글이 남겨진 가족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일을 떠올려본다. 멀리 타국에 있던 나는 친구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글이라도 써야 했는데 편지 형식의 그 글은 어찌 보면 느끼할 수도 있는 글이었다. 평소였다면 그런 글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글을 브런치에 올렸다. 그때는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친구의 가족에게 그 글을 메일로 보냈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느끼하더라도 진실하다면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남을 위로하는 글은 작가가 그만큼 많이 아팠기 때문에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언젠가 내 글이 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줄 그날을 꿈꾸며 오늘도 조금 끄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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