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차를 끄는 장교: 경계선 위에서 마주한 시선들

by 전략가 김재훈

낯선 정적, 그리고 시작된 시선들


평일 오전 10시,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는 고요하다 못해 비현실적이다. 그 정적을 깨는 것은 유모차 바퀴가 보도블록을 지나는 둔탁한 마찰음뿐이다. 군복 대신 편안한 후드티를 입고, 한 손에는 아이의 도시락 가방을 든 채 유모차를 미는 나의 모습은 이 풍경 속에서 일종의 ‘이물질’처럼 느껴지곤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의하고 문서작성하며 하루종일 긴장감을 유지해야 하는 공간에서 생활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나의 활동 지역은 거실 바닥의 장난감들이며, 나의 주요 목표는 아이 밥먹이기와 놀아주기다.


이 극명한 대비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타인의 ‘시선’이었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계시던 어르신들의 시선이 유모차를 끄는 내 손등에 머문다. 그 눈빛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서려 있다. "젊은 사람이 대낮에 왜?"라는 의구심과 "요즘 세상 참 좋아졌네"라는 식의 기특함, 그리고 아주 가끔은 "애 엄마는 어디 가고 아빠가 저 고생인가" 하는 식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선명하게 전해진다.



'대견함'이라는 이름의 가벼운 폭력


사회의 시선은 예전보다 분명 부드러워졌다. '라떼'를 외치는 시대는 지났고, 아빠의 육아는 권장되는 미덕이 되었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여전히 뼈가 있다. 마트에서 아이 기저귀를 갈고 있으면 지나가는 이들이 한마디씩 던진다. "아이고, 아빠가 참 대단하네. 엄마는 복 받았어."


처음에는 그 말이 칭찬으로 들려 쑥스럽게 웃어 넘겼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대단하다'는 형용사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기저귀를 갈 때는 당연한 일상이, 아빠가 할 때는 왜 '대단한 결심'이나 '도움'이 되어야 하는 걸까. 이러한 시선은 역설적으로 육아의 주체가 여전히 여성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무의식을 방증한다. 아빠는 어디까지나 '보조자'이자 '특이 사례'로 분류되는 것이다.


친척들이나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육아휴직? 군인이 그게 가능해? 진급은 포기한 거야?"라는 질문이 날아올 때마다 나는 웃으며 넘기지만, 속마음은 씁쓸하다. 아이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는 가치가 계급장의 무게보다 가벼울 리 없건만, 사회는 여전히 남자의 성공을 일터에서의 성취로만 규정하려 든다.



3. 고립된 섬, 엄마들의 커뮤니티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오히려 육아의 중심부로 들어갔을 때 찾아온다. 문화센터나 키즈카페에 가면 나는 금세 '고립된 섬'이 된다. 수다의 꽃을 피우는 엄마들 사이에서 나는 차마 끼어들지 못하는 이방인이다. 그들이 공유하는 정보의 네트워크와 공감의 언어 속에 남자인 내가 들어갈 틈은 좁다. 현실이 그렇다.


사람들은 나를 배려한답시고 자리를 비켜주거나 말을 아끼지만, 그 정중한 거리감이 때로는 노골적인 거부보다 더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빠가 오니까 분위기가 좀 다르네"라는 말 한마디에 나는 다시 한번 내가 서 있는 곳의 경계선을 확인한다. 육아라는 전장(戰場)에서 전우를 찾지 못한 채 홀로 고군분투하는 느낌, 그것은 군대에서의 고립감과는 또 다른 종류의 외로움이다.



4. 속마음의 층위: 두려움과 자부심 사이


나 자신의 내면에서도 시선은 엇갈린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 유모차를 끌고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두려웠다. "요즘 애 본다며?"라는 말이 내 자존감을 갉아먹을까 봐 걱정했다. 군인이라는 직업이 주는 강인함과 육아라는 행위가 주는 부드러움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내 손가락을 꽉 쥐며 잠들 때, 그리고 내가 만들어준 식단을 남김없이 비워낼 때, 그런 외부의 시선들은 먼지처럼 가벼워진다. 사회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든, 나는 지금 한 생명의 우주를 지탱하는 유일한 기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빠의 육아는 결코 희생이나 봉사가 아니다. 그것은 남자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가장 경이로운 특권이자, 인간으로서 성숙해가는 가장 치열한 훈련 과정이다.



5. 다시, 땅이 단단해지는 시간


이제 나는 타인의 시선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신기하게 바라본다면, 나는 그저 아이에게 더 크게 웃어주며 화답한다. 오해와 편견으로 날 선 말들이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더라도, 아이의 '아빠'라는 부름 한 번에 그 상처 위에 연고를 바른다.


관계가 비 온 뒤에 굳어지듯, 나와 사회의 관계도 이 낯선 진통을 거치며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고 믿는다.


아빠가 유모차를 끄는 풍경이 더 이상 '에세이의 소재'가 되지 않는 날, 그저 평범한 일상의 배경으로 녹아드는 날을 꿈꾼다.


오늘도 나는 유모차를 밀며 집을 나선다. 누군가의 시선은 여전히 내 등에 꽂히겠지만, 내 앞에는 아이가 바라보는 더 넓고 환한 세상이 펼쳐져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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