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오, 싱싱하고 싸네."
손님이 우리들을 마음에 들어 하면서
봉지에 골라 담기 시작했어요.
마트에서는 손님들이 직접 키위를 골라 담아
10개를 싸게 살 수 있는 행사가 진행 중이었지요.
포장되어 있는 키위들에 비해서 행사 상품이
알이 굵고 싱싱하다고 손님들에게 인기 만점이었죠.
그런데 아무리 인기 많은 코너면 뭐 하나요.
내가 아무에게도 선택받질 못했는걸요.
10개 안에 뽑히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매번 나는 선택받질 못하고 있어요.
선택받지 못하는 이유도 매번 달랐어요.
조금 더 말랑한 걸 원하는데 나는 단단해서,
조금 더 큰 것을 원하는데 나는 작다고,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등등
손님들의 기호가 모두 달라서 그들의 손에
선택되는 것이 얼마나 어렵던지요.
선택받지 못하고 계속 탈락만 하니까
점점 마음에 불만이 쌓여갔어요.
이젠 그냥 아무에게나 빨리 선택되어
마트나 벗어나고 싶다고 말이에요.
손님들이 9개까지 고른 봉지를 볼 때마다
나는 손님들과 눈 맞추기를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지 뭐예요.
설마 내가 탱글탱글한 탄력감을 다 잃고
물렁물렁 물러 버릴 때까지 마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행사 기간 내내 손님들의 손이 나만 비껴가니까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마음이 불안해지니까 여유를 잃어서
별것도 아닌 일에 괜히 까칠해지더라고요.
불안하고 까칠한 마음만 가득해진 날에
드디어 나도 선택받을 수 있었답니다.
이번에도 마지막 10번째로 겨우 뽑혀서
정말 긴장했었어요.
또 대기조로 밀려나게 될까 봐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드디어 마트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기뻤어요.
그런데요.
내가 잘 몰랐던 게 있어요.
마트 바깥으로만 나가면 세상 구경을
좀 하게 될 줄 알았더니,
마트 안에서 진열대에 펼쳐져 있을 때보다
더 안 좋은 거 있죠.
그래도 마트에 펼쳐져 있을 때는
고만고만한 키위들끼리 뭉쳐 있다 보니
특별히 더 무거울 것도 없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진 않았거든요.
그런데 계산을 마치고 장바구니에 담기는 순간
다른 재료들에 내 몸이 시달리게 될 줄이야!
장바구니 안은 어둡고 답답했어요.
바닥이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물흐물 거리는 장바구니지 뭐예요.
물건이나 좀 적게 샀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중에는 무게감이 있는 것들도 있어서
비닐봉지에 담겨 있던 나를 계속 눌러댔어요.
나는 장바구니에 있는 동안 계속
"키위 살려"를 외쳐야 했답니다.
가까이 자리를 잡고 있던 당근들!
얘네들이 가장 문제였어요.
나도 숙성되기 전에는 꽤 단단한 몸을 가졌는데
더 단단한 몸으로 나를 밀던 당근들 때문에
정말 짜증 나서 장바구니를 탈출하고 싶더라니까요.
빨리 집에 도착하면 좀 낫겠지 싶었는데,
이 장바구니의 주인이 하필 이 동네 사람이
아니었어요.
주인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몇 번 하는 동안
장바구니가 흔들리니까 어지럽고 힘들었어요.
주인은 지하철을 타고 이동을 하더군요.
내가 원한 것은 바깥세상 구경이었는데
장바구니 안에서는 볼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지하철의 에어컨 바람이라도 장바구니 속으로
들어왔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덥기까지 해서 더 힘들었겠죠.
그래도 나는 기대가 있었어요.
이 고통만 견디면 내가 도착한 그곳에서는
나만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키위이기 때문이었어요.
조금 숙성시켜서 먹었을 때 제일 맛있으니까
그때까진 여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렇지만 이동거리가 생각보다 멀었어요.
지하철에서 한참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이번에는 버스로 갈아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지하철에서도 지루해서 힘들었는데
버스에 타고 보니 차라리 지하철이 좋았던 거였어요.
버스는 지하철에 비해 더 많이 흔들리고
덜컹거리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버스는 공간도 더 좁고 답답했어요.
나는 장바구니에 더 있다가는
숨 막혀서 기절할 것만 같았어요.
"당근! 옆으로 조금만 움직여 볼래?
네가 뾰족한 끝으로 밀쳐서 아파."
"나도 그러고 싶지만 자리가 없어."
하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놓여있는 건
당근도 나와 마찬가지긴 했어요.
자꾸 짜증이 나지만 참아야 했죠.
그런데 내가 좀 유난스러운가 봐요.
다른 친구들은 잘 참고 있는데도
나는 짜증이 나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너무 장바구니에서 탈출을 하고 싶어서
몸을 막 흔들어대기 시작했답니다.
그 때문인지 장바구니가 갑자기 픽 쓰러지면서
안에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다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아, 바로 지금이에요.
하늘이 내게 주신 기회인 것만 같아서
나는 있는 힘껏 데구루루 굴러서 의자 밑으로 숨었어요.
내가 용감하게 구르니까 다른 키위 친구들도
덩달아 여기저기로 구르기 시작했죠.
갑작스러운 탈출이긴 했지만 키위 친구들이
아주 신나 보이더라고요.
나는 의자의 구석까지 굴러가 자리를 잡고
주인의 얼굴을 살짝 훔쳐보았는데요.
버스 안에서 장바구니의 물건들이
다 쏟아져버린 상황인지라 주인의 얼굴은
정말 난처해 보였어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몸을 구부려가면서
흩어진 물건들을 주워야 하는 것이
되게 창피해 보이기도 했고요.
버스는 계속 달리고 멈추고를 반복하며
흔들림이 있으니까 그 동작들이 쉽지 않아 보이기도 했어요.
의자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은 나는
반대쪽으로 굴러갔던 키위들이 하나씩 둘씩 잡혀서
다시 장바구니에 담기는 걸 지켜보았어요.
처음에는 장바구니를 탈출했다는 것이 너무 신나서
나를 천천히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숨바꼭질놀이하는 것처럼 긴장되고 설레는 면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바닥에 쏟아졌던 각종 채소와
여러 가지 물건들을 모두 담을 때까지
주인은 나만 못 찾는 거 있죠.
"아휴, 힘들어. 버스 안에서 쭈그려 찾는 거
창피해서 못하겠다. 대충 다 담은 거 맞겠지?"
그렇게 말하지 뭐예요.
"아... 이건 말도 안 돼요.
내가 바깥세상을 구경하고 싶기는 했어도
버스에다 두고 내리는걸 원한 적은 없었어요.
이렇게 버스 안에 혼자만 남고 싶지 않아요.
나 여기 의자 밑에 있어요.
제발 아래쪽을 더 자세히 봐주세요."
탈출놀이와 숨바꼭질놀이에 신났던 나는
졸지에 버스 미아가 되게 생겼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버스가 흔들려서인지 내가 굴렀기 때문인지
멀미까지 나더라고요.
이대로 나를 포기하고 버스에서 내려버릴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대충 주워 담은 주인은 키위들을
하나씩 세어보더니 말했어요.
"어? 키위가 9개밖에 없네?
하나는 어디 갔어?
개수가 많다는 이유로 사서 들고 온 건데
잃어버리면 굳이 들고 온 의미가 없잖아."
주인이 이제야 알게 됐네요.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에요.
나는 너무 떨리고 긴장됐어요.
주인이 도대체 언제 버스에서 내릴지 모르니까요.
"빨리요! 제발 빨리요!
나 좀 빨리 장바구니에 담아주세요. 네?"
나는 이렇게 숨 가쁘게 외치고 있었답니다.
주인은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이
좁은 통로의 사이에 머리를 집어넣고
이쪽저쪽을 살피더니 구석 끝까지 굴러가 있던
나를 드디어 발견했어요.
"아휴, 너 거기 있었구나? 찾았다!"
주인의 손에 잡히는 순간
이제 됐다 싶었어요.
이대로 버스에서 버려지는 줄 알고
얼마나 움츠러들었는데요.
장바구니에 무사히 담기는 순간
내가 잠시 착한 키위가 된 것만 같았어요.
키위 친구들을 다시 만난 것도 너무 반갑고,
나를 아프게 밀어대던 당근을 봐도 반갑고,
그 외에 다른 물건들까지 너무 반가웠거든요.
그렇게 나는 집에 무사히 도착했어요.
큰 긴장이 풀린 탓인지 이제 좀 마음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인은 사 온 물건들을 꺼내면서 정리를 시작했죠.
주인이 버스에서 나를 찾자마자
급하게 버스에서 내려야 했기 때문에
나는 다른 키위들과 같은 봉지에 담겨 있지 못하고
따로 담겨 있었는데요.
주인이 나를 손에 들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버스에서 너를 못 찾았으면 너무 아까웠을 텐데
찾아서 정말 다행이야."
그 말을 듣고 진짜 기뻤거든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기까지 했답니다.
그런데, 그다음 말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어요.
"근데, 너는 버스에서 우당탕탕 쏟아져서 그런 거니?
왜 색깔이 다른 애들이랑 다르지?
골탕 들어서 그런 건지 너만 말랑말랑해졌어.
숙성시킬 필요도 없이 너부터 먼저 먹으면 되겠다."
"아...... 이게 뭐야!!!
마트에서 선발될 때는 그렇게도 안 뽑히더니
왜 오자마자 1등으로 나를 먹겠다고 하는 거예요?
뽑을 때는 10등이었는데, 왜 먹을 때는 1등으로 뽑아요?
싫어요! 싫어요!
처음처럼 10등 시켜 달란 말이에요."
나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내가 투덜거리면서 보낸 매 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소중한 순간이었다는 것을요.
짜증 내고 불평할 시간에
조금 더 감사하며 지낼 걸 그랬습니다.
조금 더 웃으면서 지낼 걸 그랬습니다.
나도 웃으면 조금 더 예쁜 키위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이 참 많이 후회가 되는 이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