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창작동화
여러분!
나는 지금 너무 슬프고 억울해서
더 빠른 속도로 시들 것만 같거든요.
그러니 내가 시들기 전에
속상한 이야기 좀 들어주실래요?
나는 상추예요.
내가 그동안 밥상 위에 한번 올라 보겠다고
얼마나 열심히 자라왔는지 몰라요.
오늘은 내가 상추쌈이 될 수 있는 날이었거든요.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겨났어요.
오늘 밥상 위에 올라갈 대기자들은
모두 채소였답니다.
첫 번째 대기자였던 호박은
깨끗하게 샤워 마치고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썰리더니, 프라이팬에서 볶아져서
무사히 밥상 위에 잘 올라갔어요.
두 번째 대기자였던 가지도
시원한 물에 뽀드득 샤워를 마치고
길쭉길쭉 썰리더니 맛있는 맛간장이 들어간
가지 조림이 되어서 밥상 위에 올랐답니다.
다른 채소들은 볶음 요리, 조림 요리로
밥상 위에 무사히 올라가는 것에 성공했는데,
나만 이게 뭐예요.
상 위에 오르기 전 개수대에서 샤워하다 말고
탈락당하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어요.
아마 대부분의 채소들은 상 위에 오르는
그날을 위해서, 각자 자신이 있는 곳에서
열심히 자라왔을 거예요.
조금이라도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최고의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나도 그렇게 열심히 자라온 상추 중의 하나였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순서였거든요.
내 삶의 하이라이트인 밥상이라는 무대 위에
올라갈 수 있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단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설렜는지 모르실 거예요.
다른 채소들과 달리 나는 샤워만 깨끗하게 하면
불 위에 올라갈 필요도 없잖아요.
나처럼 손도 적게 가면서 상 위에 오르는 순간
밥상 위의 싱그러움을 책임지는 멋진 채소가
어디 있어요?
그렇다고 내가 다른 상추들처럼,
삼겹살이라도 하나 얹어달라고
바란 적이라도 있나요?
나는 그냥 쌈이 되고 싶었다고요.
이렇게 소박한 상추인 내가 밥상 위에 오르기를
실패했다니 너무 하잖아요.
샤워 하나를 제대로 못 시켜주는
인간의 손이 너무 미웠어요.
아니 왜 호박도 잘 씻겨 주고,
가지도 잘 씻겨 주었으면서
나만 손에서 떨어뜨려요?
정말 너무했어요.
하필 개수대 물청소도 잘 안된 날에
더러운 구멍에 떨어뜨릴 게 뭐냐고요.
으...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요.
근데 피해자인 내가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나를 떨어뜨린 손이 오히려 더 짜증을 내지 뭡니까.
왜 나더러 구정물에 빠졌냐고 화내더라고요.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요?
신선함이 최고로 중요한 쌈 채소인 내가
스스로 구정물에 다이빙한 것도 아니잖아요.
왜 내가 뛰어든 것도 아닌데
그런 내게 뭐라 하는 거냐고요.
인간의 헛손질 때문에 피해를 본 게 나라니까요!
피해보상청구를 해도 내가 해야 할 판에
더러운 물에 빠진 나를 먹기에는 찜찜하다면서
나를 탈락시켜 버렸어요.
나더러 밥상 위에는 절대 못 올라간다지 뭐예요.
아, 정말 억울해서 못살겠어요!
개수대에 물때만 끼지 않았어도 내가
더러운 곳에 추락했다는 소린 듣지 않았을 거예요.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기껏 인간이 한다는 말이
"식사한 후에 한꺼번에 청소하려고 했어."였어요.
이걸 변명이라고 하더라고요.
잘 안 치우려면 일관되게 지저분해야 하는데,
인간은 자기 입안에 들어갈 음식이
위생상태 지저분한 건 무지 싫어하더라고요.
더러워진 개수대에 떨어진 상추는 찜찜해서
밥상에 올릴 수가 없다는 것이
나를 탈락시킨 이유였어요.
내가 잘못한 것은 단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어이없게 밥상 위에 올라갈 기회를
박탈당해 버리다니 너무 억울해요.
이렇게 싱싱한 내가, 쌈도 한번 못되어 보고
탈락의 쓴 맛을 보게 된 이 기분을
당신들은 짐작이나 할 수 있으신가요?
이 주방에 있는 식기류와 식재료들을 통틀어서
지금 이 순간 나보다 더 억울한 분 있으면
나와 보실래요?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나를 놓쳤으면서
상추인 나만 탈락시키는 인간이 미워요.
오늘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밥상 위의 싱그러운 상추쌈이 될 수 있었던
날이었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분명
각자의 쓸모가 있을 텐데,
그 쓸모를 다하지 못하고 버려지는 삶은
너무나 서글프게 다가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사소한 실수가
누군가에게는 큰 슬픔을 가져다줄 수도 있음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다음에 주방 수도꼭지에서 샤워하게 될
다른 채소들 중에는, 나처럼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인간 여러분!
앞으로 무조건 섬세한 손길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