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한 조각

내 맘대로 창작스토리-7

by 마이드림

내 이름은 당근!

제주 흙당근 출신이랍니다.

섬을 떠날 때만 해도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물 건너온 만큼 더 선명하고 맛있는

당근이 되어주겠다며 열정이 불타올랐죠.


내가 배정된 곳은 경기도에 위치한 마트!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었어요.

나는 손님에게 선택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어떤 요리를 빛내는 당근이 될 것인지

많은 상상을 해보았답니다.


나는 어떤 요리에 참여하게 될까?

나는 맛있는 갈비찜에 들어갈지도 몰라요.

아니면 잡채 속에 들어갈 수도 있겠죠?

어쩌면 김밥 속에 들어가려나.

잘게 썰어서 계란말이에 들어갈지도 몰라요.

카레 속에 들어갈지도 모르죠.

아, 너무 궁금하고 기대됐어요.


나를 선택한 주인은

당근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세일을 해도

굳이 나를 사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주인은 나를 깨끗하게 씻어주었어요.

흙이 가득 묻어 있어서 간지러웠는데,

얼마나 개운하던지요.


그런데요.

주방에 재료가 나와 있는 게 없었어요.

꺼내 놓은 것이라고는 나와 찜기뿐이었어요.


"다른 재료들은 하나도 안 들어가고

당근으로만 요리를 만들려고 하는 건가?

나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죠.


잠시 후 동그랗게 썰어진 나는

물이 끓는 찜기에 들어가게 됐어요.

나는 처음으로 뜨거워 숨 막히는 사우나를

경험하게 됐죠.

당근인 나는 워낙 몸이 단단하니까

뜨거움을 잘 견딜 줄 알았는데

찜기 사우나는 생각보다 더 뜨거워서

"당근 살려!"를 외치게 되더라고요.


당근 요리가 된다는 것은

상상처럼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었어요.

뜨거움을 감수해야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때까지는 괜찮았어요.

그 과정들을 거치면 나는 요리 속의

멋진 당근으로 변신해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요.

이 정도의 뜨거움은 문제없다며

불끈 힘을 냈죠.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당근을 좋아하는 집에 온 것이 아니고

요리를 좋아하는 집에 온 것도 아니었어요.

당근을 챙겨 먹겠다고 결심한 사람의 집에

어쩌다 보니 온 것이었어요.


당근 특유의 향을 싫어하는 주인이

생으로는 도저히 못 먹겠다면서

살짝만 쪄 먹기로 결정한 거라지 뭐예요.

제발 맛있게 요리를 해 먹으라고요!


기대와 달라서 너무 실망스러웠지만

그런데도 나는 긍정회로를 돌렸답니다.

요리가 아니면 어때요.

나는 요리 속의 일부인 당근이 아니라

찐 당근 자체로 메인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죠.

생각을 바꾸니까 나름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어요.

찜기에서 당근들을 꺼내 접시에 옮길 때

하필 내 조각이 슝... 옆으로 날아가

가스레인지 밑으로 쏙 들어가 버렸지 뭐예요.


당근인 내가 날아가는 일은

애초에 내 예상 범위에는 없었던 일이었죠.


"답답해요. 나를 꺼내주세요."

나의 외침은 그렇게 가스레인지 틈새에서

공중에 흩어지더이다.


가스레인지 밑을 대충 들여다보던 주인은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는다면서

나를 찾는 것을 포기해 버리더라고요.


그때의 배신감이란 정말 말도 못 해요.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는 인간 세상의 말은

당근인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던가 봐요.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요.

찜기 사우나로 보들보들했던 내 피부는

어느새 수분이 사라져 버렸어요.

쪼그라들며 몸이 말려가고 있었죠.


바쁘다면서 한참을 미루던 주인이

틈새에 끼어 있는 나를 찾아냈을 때,

나는 정말 너무 반가웠어요.

"왜 이제야 나를 구조하러 왔어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요?"라는

투정 섞인 말도 살짝 튀어나왔지요.


주인은 무지 덤덤하게 말했어요.

"썩어서 벌레 생길까 봐 걱정했는데

그 사이에 말라버려서 다행이네.

당근이 마르니까 꼭 당근말랭이 같네.

근데 무말랭이처럼 당근도 말려서 먹나?"


"당근말랭이라고요?

그럼 나는 이제 당근 말랭이라는 요리가

될 수 있는 건가요?"

혼자 막 새로운 희망이 생기려는 순간

이어진 주인의 말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죠.


"근데 먼지 속에서 말라버린 당근 조각을

굳이 내가 씻어서 먹을 수는 없잖아.

당근아 미안하다. 나는 못 먹겠다."


맙소사!

나를 이 구석에 날려 보낸 것도

주인이 저지른 짓이고,

빨리 꺼내주지 않고 둔 것도 주인인데,

아무 잘못도 없는 나만 쪼글쪼글 말라서

외면당하고 있는 이 슬픈 현실

뭡니까요 정말!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입을 삐죽이다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보았어요.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화만 내면서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서요.


나는 어쩌면 주방에서 날아

가스레인지 밑에 골인한

채소계의 전설이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 활짝 웃을래요!


냄비나 프라이팬을 탈출하는 채소들이

있기는 하지만요.

가스레인지 옆도 아니고 밑으로 날아가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나는 날았어요.

가스레인지 밑에서 마르는

특별한 경험을 한 당근이에요.

그러니 나는 웃을래요

쪼그라들고 있어도 주황빛을 잃지 않은

나의 이름은 당근입니다.


당근이는웃을래요.jpg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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