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도시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이 도시에 대해 제대로 소개를 하지 않은 것 같다. "내 자식 너무 예쁘지 않아요?"라며 자식 자랑만 막무가내로 늘어놓는 부모처럼 좋아한다는 감정만 앞세운 것 같다. 여기에선 잠시 스코틀랜드와 그 수도인 에든버러의 역사에 대해 짚어보아야 할 것 같다. 역사란 그 나라의 정체성이기 때문에 조금은 복잡할지도 모르지만, 한 번은 알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영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진 영국연합왕국(The United Kingdom)이다. 그리고 에든버러는 영국연합왕국을 이루는 곳 중 한 곳인 스코틀랜드의 수도이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같은 국가로 묶여있기는 하지만, 그만의 독특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와 잦은 충돌을 일으켰다.
스코틀랜드는 원래 '칼레도니아'라고 불렸는데, 기원이 확실하지 않은 픽트인, 아일랜드에서 이주한 스코트인, 앵글로색슨인에게 쫓겨 남부에서 이동한 브리톤인의 세 종족이 섞여 살았다. 기원 후 2세기 로마제국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켈트인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이들을 막으려고 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그 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로 굳어졌다.
잉글랜드가 7왕국시대를 거쳐 통합 왕국으로 발전하던 9세기에 스코틀랜드는 스코트인과 픽트인을 통합한 왕국으로 발전했으며, 당시 케네스 1세는 왕국의 수도를 스콘(Scone)으로 옮겼다. 그리고 11세기 이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자주 충돌하게 되는데, 1286년,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3세 왕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게 되면서 스코틀랜드의 잉글랜드에 대한 독립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상황은 이러했다. 알렉산더 3세는 왕위를 이을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죽었고, 그나마 적법한 왕위 계승자를 찾은 것이 바로 외손녀였던 노르웨이의 처녀 마가렛이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상왕권을 틈틈이 노리고 있었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1290년, 자신의 아들과 마가렛을 결혼시킨다는 버갬조약을 맺으며,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지만, 1290년 마가렛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결혼 협상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로써 왕위 계승을 위한 새로운 경쟁이 시작되었는데, 스코틀랜드의 평화를 원하는 귀족과 성직자들이 에드워드 1세의 개입을 원한 것이다. 이에 상왕권을 주장하며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직접 요구한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의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력으로 왕위 계승권 주장자들을 위협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에드워드 1세 주도 하에 13명의 왕위 계승권 주장자들의 상속권 주장의 적법성 여부를 따지기 위한 소송 절차를 진행하였다. 이른바 대소송(Great Cause)이 시작된 것이다.
대소송에서는 존 벨리올의 장자 상속법의 원칙 주장과 로버트 브루스의 근친 주장 중 어느 것이 더 우선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의 중심이었지만, 에드워드 1세의 관심은 누구를 스코틀랜드 왕위계승권자로 선정하여야만 스코틀랜드와 스코틀랜드인에 대한 그의 지배권, 즉 상왕권을 확보하고 그것을 안전하게 행사할 수 있는가에 집중되었다. 결국 대소송을 통하여 에드워드 1세는 1292년 11월에 존 벨리올(존 1세)을 왕위계승권자로 최종 결정하였다. 스코틀랜드 왕국이 에드워드 1세에게 종속된 시점은 1296년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왕 존 1세가 에드워드 1세에게 패배한 이후가 아니라 바로 대소송에서 에드워드 1세가 유력한 왕위 계승권 주장자들로부터 신서를 받은 때부터라고 주장한 스코틀랜드 연대기의 서술이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이후 스코틀랜드는 독립전쟁이라는 이유로 잉글랜드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1328년 에든버러/노샘프턴 조약으로 독립왕국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두 왕국의 대치는 이어진다. 그러다 1603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후사 없이 죽게 되자, 그녀의 사촌이었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아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통합 왕국의 왕인 제임스 1세가 된다. 왕국 통합에 이어 1707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의회가 통합됨으로, 에든버러의 의회는 런던으로 옮겨가게 된다.
1920년대 스코틀랜드에서 민족주의적 국민정당이 출현한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대브리튼 연합왕국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을 주장한 민족주의적 정당으로 출발했으며, 1970년대에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론이 대브리튼 연합왕국 체제에 큰 충격을 줄 정도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토니 블레어 정부는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운동을 달래기 위해 스코틀랜드 자치법을 통과시켜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나머지 분야에 있어서 자치권을 허용하였으며, 이로써 1999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부활하였다.
에든버러는 1437년, 이러한 역사를 가진 스코틀랜드의 수도가 되었고, 그때부터 현재까지 스코틀랜드의 정치. 문화. 사회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도시에는 약 반 세기 가량 지속된 '계몽시대(Edinburgh Enlightenment)'라는 특별한 시기가 있는데, 에든버러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이 이야기는 로열 마일을 지나며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