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걸음을 멈추고,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으로.
쉬엄쉬엄 프린시즈 스트리트 가든을 걷다가 올라왔다. 주인의 손에 이끌려 산책 중이던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달려드는 바람에 나의 평온한 산책이 순간 위기를 맞을 뻔했다. 하늘은 맑게 갰지만, 이곳의 바람은 오래 맞을만한 게 못 되었다. 어서 실내로 피신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옆에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이 보였다.
내가 전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있었던 루벤스의 전시를 본 후로 전시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쉽게 보지 못했던 거대한 사이즈의 작품들에게서 느껴지는 웅장함에 압도되고, 작품의 이곳저곳을 뜯어보는 소소한 재미에 매료되고. 이런 순간들이 전시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이제는 여행을 갈 때마다 그 도시에 있는 미술관을 놓치지 않고 방문한다. 인상적인 작품을 발견했다면 그곳은 그 도시에 머무는 동안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 되기도 한다. 처음 런던에 갔을 때는 내셔널 갤러리가 그저 발자국만 남기고 오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런던에 머무르는 기간 동안 수시로 찾아가는 곳이 되었다. 드레스덴에 갔을 때에는 츠빙거 궁에서 작품을 마음껏 뜯어보는 재미를 누렸다. 오래된 궁전에 작품들이 한가득인데, 사람은 없으니 그 여유를 누릴 수밖에. 이 작품의 제목은 왜 이것일까? 이 작품에 숨겨진 의미는 무얼까? 작품 앞에 서서 그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느끼고 요모조모 뜯어보고 생각하고. 맘에 드는 작품 앞에 오래도록 서 있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은 그림들 앞에서는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보기도 하고. 매우 여유롭게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 들이 쌓이면서 전시에 가는 재미는 더 커졌고, 어느 도시를 가든 그 도시에 있는 미술관에 방문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에든버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시내 중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수시로 들락거릴 수 있는 여건도 갖추어져 있었다.
스코틀랜드에는 네 종류의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이 있다.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Scottish National Gallery, 최근 National로 명칭 변경), 현대미술관 1(Modern One), 현대미술관 2(Modern Two), 그리고 스코틀랜드 국립초상화미술관(Scottish National Portrait Gallery). 그중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은 에든버러의 중심지인 프린시즈 스트리트 가든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대부분의 화장실 사용이 유료인 에든버러에서는 이런 공공건물의 화장실을 알아두는 게 여행의 중요한 팁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은 1859년,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건물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 건축가인 윌리엄 헨리 플레이페어(William Henry Playfair, 1790년 7월 15일~1857년 3월 19일)의 작품이며, 신고전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곳에서는 티치아노, 컨스터블, 렘브란트, 루벤스 등 이름부터 익숙한 화가들의 작품부터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왠지 눈길을 끄는 헨리 레이번, 피비 안나 트라콰이어 등 스코틀랜드 미술에 영향을 미친 화가들의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이곳의 전시 작품 중 가장 나의 마음과 눈을 사로잡은 세 작품을 골라봤다.
Lady Agnew of Lochnaw
로크노의 애그뉴 부인
미국 출신의 화가 '존 싱어 사전트 John Singer Sargent'의 작품이다. 준남작이었던 앤드류 애그뉴 경(Sir Andrew Agnew)의 아내, 거트루드 버논(Gertrude Vernon)이 주인공이다. 두 사람은 1889년에 결혼했고, 남편인 애그뉴 경이 1892년에 작품 제작을 의뢰했으며, 같은 해에 완성되었다.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은 1925년 코완 스미스 유산(Cowan Smith Bequest Fund)을 통해 이 작품을 구매하였다.
묘하게 시선을 끄는 작품이다. 작품 속 주인공의 느긋한 듯한 자세와 정면을 응시하는 눈빛이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연보랏빛의 리본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게 신기하다.
The Reverend Robert Walker Skating on Duddingston Loch(The Skating Minister)
이 그림은 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 왠지 근엄하고 진지할 것만 같은 계몽시대의 목사가 이런 모습으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게 귀엽다고나 할까?
스코틀랜드 출신의 화가인 헨리 레이번(Henry Raeburn)이 그의 친구인 로버트 워커 목사를 그린 작품이다. 스코틀랜드 계몽시대인 1795년에 그려졌고, 오랫동안 워커의 후손들에 의해 소장되었다가, 1949년 크리스티 경매에 나오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National Gallery of Scotland의 관장이었던 엘리스 워터하우스(Ellis Waterhouse)가 이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525파운드에 구매했다.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작품이라 그런지 처음에는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다. 그러나 1973년, 헨리 레이번 사망 15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에 작품 이미지가 실렸고, 1997년 런던 초상화 갤러리에서 있었던 헨리 레이번 전시에 포함되면서 대중의 눈에 띄게 되었다. 또한, 1998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열린 '브리티시 페인팅즈 Pintura Britanica' 전시에 포함되면서 작품의 이미지가 기념품 등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The Monarch of the Glen
글레노키의 제왕
이 작품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한참을 바라보며, 저 수사슴이 응시하는 곳이 어디일까 상상하게 된다.
이 작품은 잉글랜드 출신의 화가 에드윈 랜드시어 경(Sir Edwin Landseer)이 그린 작품이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 동물을 소재로 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있는 사자상일 것이다.
랜드시어는 1824년 이후로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를 여행하면서 수사슴을 스케치해 왔고, 1840년대부터 습작을 남기기도 했다. 1850년, 영국 상원의 식당을 장식할 작품을 의뢰받아 이 그림을 그렸으나, 작품 완성 후 하원에서 약속한 150파운드를 허가해 주지 않아 개인 수집가의 소장품이 되었다. 이후 여러 회사에 소장되며 광고 이미지 등으로 쓰이기도 했는데, 2017년, 스코틀랜드 내셔널 갤러리가 이 작품을 구매했고, 현재 내셔널 갤러리 룸 12에 전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