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쯤 그림을 배우겠다고 대형마트 문화센터에서 운영하는 직장인을 위한 주말 강좌를 신청했다. 그러나 결심은 오래 못 가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처음엔 분명 재미있었다. 그러나 갈수록 흥미가 떨어지고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선생님이 자꾸 내 그림이 틀렸다고 지적하셨고 나는 그걸 수긍하지 못했던 이유가 가장 컸던 것 같다. 선생님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눈과 손이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어김없이 수정하셨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자꾸 주의를 주셨다.
지난번에 얼굴 그리는 공식 알려 드렸는데…
"얼굴에 비해 눈을 너무 작게 그렸네요. 왼쪽, 오른쪽 눈 길이도 안 맞고… 앞으로 눈 길이는 이렇게 3등분 해서 그리세요. 입술 길이는 괜찮은데 여기 이렇게 입 꼬리를 처지게 그리지 말고 끝을 살짝 올려주면 좋아요. 그러면 얼굴이 살아요. 코 길이는 얼굴의 1/3쯤이어야 하는데 너무 길군요. 그리고 코는 이렇게 선으로 다 그리지 말아요. 그러면 인조인간처럼 보이거든요…. 지우개 좀 줘 보세요.”
아니! 왜? 또! 나도 내 느낌대로 내가 보는 대로 그리고 싶은데, 왜 자꾸 나더러 아니라고 해!
이렇게 항명은 차마 못 하고…. 속으로 억울해하기만 했다. 나는 실망했다. 그림은 막 그리는 게 아니구나… 고작 3개월의 경험이지만 내게 그림은 아무나 하기 힘든, 타고난 재능을 부여받은 자만이 도전할 수 있는 특수한 영역으로 남게 되었다.
다시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한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이유를 되짚어 보다가 어릴 적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출근 전 잘 다린 흰 셔츠를 입은 아빠를 꼼짝도 못 하게 앉혀놓고 화선지에 먹으로 아빠를 그렸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아마 초등학교에서 처음으로 붓글씨를 배우던 때였던 것 같다. 아빠는 그런 내가 기특했는지 초상화를 손에 들고 한껏 턱을 치켜든 나를 사진으로 남겨주셨다. 그냥 열심히 그렸을 뿐인데 아빠는 감격스러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어릴 적 나의 우상이었던 아빠의 칭찬은 그림에 대한 근자감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학창 시절 그림에 대한 추억은 이게 전부다. 그 흔한 교내 미술 사생대회에서 상 한번 받아 본 적 없다. 수채화 채색기법, 원근감, 3점 투시도를 배우면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에 감탄하면서, 화가들의 빛나는 테크닉들을 주입식으로 달달 배우면서, 나도 모르게 그림에 대한 근자감은 사라져 버렸다.
백신 보급으로 코로나19 종식에 대한 희망이 부풀던 2021년 4월 어느 날, 늘 다니던 산책길에서 벚꽃을 구경하다 우연히 나무 뒤에 가려진 2층 화실을 발견했다.
“화실이다! 여태 왜 못 봤지?”
그날 이후 자꾸 그림을 다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일렁거렸다. 그림 생각을 잊었다 싶으면 또 났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뭐지? 퇴근 후 바빠서? 사실 나 요새 별로 안 바쁜데… 애들은 다 컸고. 음… 괜히 물감 사고 종이 사고 그러다 지난번처럼 그만두면? 아… 생각만 해도 귀찮다! 고마 안 할래!”
시간이 갈수록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왠지 해야 할 이유 속에 묻히기 시작했다.
"그림이 좋아서 그리고 있으면 그 사람이 화가고 예술가가 아닌가? 왜 그림은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고 믿지? 왜 사진처럼 똑같이 그려야 잘 그렸다고 생각하지? 사진처럼 그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면 차라리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으면 되지! 그냥 좋으니까 재미 삼아 그리면 안 되나? 도대체 그림을 그리는데 누구의 허락이 필요하단 말인가?"
다시 스케치북을 사고 연필을 사고 물감을 샀다. 이번엔 취미 수준의 값싼 재료가 아니라 중급자 수준들이 사용하는 고급 재료들로 골랐다. 나 자신을 스스로 초보자라고 생각하면 늘 배우고 채워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매주 2시간씩 화실을 다니며 다시 선 긋기를 하고 드로잉 기초를 배웠다. 이번엔 화실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릴 만큼 그림이 주는 매력에 푹 빠져 버렸다. 그저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 하나만 버려도 그림이 이렇게 재미있구나 싶었다. 심지어 주말에도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릴 만큼 그리는 행복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어야 했다. 화실 사정으로 이제 막 채색을 배우려는 단계에서 또다시 멈추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엔 도저히 그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어느새 그림은 내게 진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꼭 전문가에게 배워야 한다는 생각도 이 참에 버리기로 했다.
예술은 아무나 한다!
새벽 5시 모닝 루틴을 하며매일 드로잉 연습을 하기로 나와 약속 했다. 혹시나 중도에 포기 하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작년 8월부터는 블로그에 매일 드로잉 자료를 올리는 강수까지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