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오랜 지인이 결혼했다. 노량진에서 공부를 같이 했고,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1년에 한두 번은 만나며 연락을 이어왔는데 드디어(?) 결혼을 한다고 했다. 심지어 그녀의 어머니와 나의 시어머니도 친분이 있는 터라 결혼식에 온 가족이 총출동했었다. 9월의 신부는 아름다웠고 오랜만에 결혼식 참석이라 조금 색다른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녀의 인스타에 신행 사진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며 너무 오랜 옛날 같은 나의 신행도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지난 일요일에 신행에서 돌아왔고, 그녀가 맞닥뜨릴 기혼자로서의 삶에 생각이 미쳤다.
결혼. 결혼.
결혼이라는 제도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질문이 잘못되었다. 그녀는 어떻게 그녀의 행복을 만들어가게 될까. 굳이 결혼을 목적어에 놓지 않더라도 우리는 행복해지기 어려운데, 결혼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어떻게 행복을 구현해 낼지는 정말 많은 능력을 요구한다. 결혼을 결심하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들어서 결혼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냥 하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큰 결심이 선 결혼이더라도 두 사람이 결혼의 모양을 맞추어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무리 오랜 연애여도 그 사람의 작은 습관까지 알기는 어렵고 그런 모습 하나하나를 견디고 참고 이해해 보는 일에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다가 정말 운이 좋아서 잘 맞는 것 같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러기 어렵고, 생각지도 못하게 싫은 구석을 발견하면 세상에 이런 큰일이 없다. 저 꼴배기 싫은 거 평생 어떻게 보고사나 싶고 슬퍼지기도 하겠다. 미지의 세계는 늘 흥분과 공포가 함께하는 법이지.
세상 다 산 거 같은 나도 고작 결혼 14년 차라서 앞으로 나의 결혼생활이 어떻게 망가질지 알 수 없지만, 나 역시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내 선택이 꺾일 때, 내 기대가 무너지고 함께 살 사람의 가치관이 나와 1도가 아니라 한 14도 정도 어긋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 발등을 찍으며 좌절했고 울었다. 그걸 해결하는 것에 단지 시간의 힘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중요한 것은 결국 '내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혼을 하라는 거냐 말라는 거냐고 묻는다면, 내가 하라면 할 거고 하지 말라면 안 할 거냐고 되묻고 싶다. 그걸 남한테 결정할 마음이면 일단 하지 말아야 되는 게 맞다 싶고. 남편과 그런 이야기를 했다. 잘 맞아야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안 맞아서 잘 못 사는 것도 아니라고. (우리는 잘 안 맞는 편이다. 너무 다르다. ) 잘 안 맞아도 살아지기도 하고, 잘 맞아도 안 살아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자기의 선택을 너무 자만하거나 너무 자책하지 말기를. 물론 그 맥락의 한가운데에서는 잘 안보이긴 하겠지만.
되게 싫은 시간과 너무 좋은 시간을 지나 진폭이 작아지는 시간이 오면 그때에야 비로소 결혼을 반추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사람이 좋은 면만 열심히 볼 수는 없다. 안 좋은 면을 보는 일은 지금도 싫지만 나의 무엇으로 그것을 덮고 너의 무엇으로 그것을 극복해 볼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으로 결혼을 치열해진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약속인 만큼 그 약속의 무게는 무겁겠지만 아니다 싶을 땐 번복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떤 명분보다 두 사람의 행복을 맨 앞에 두어야 하는 문제다. 아름답고 슬기롭게 해결하면 좋겠지만, 그 약속이 깨진다고 해도 누구도 그 선택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그럴 땐 그 선택이 오직 두 사람의 문제가 되는 아이러니.
생각을 하다 보니 쓸데없이 심각해졌는데, 어쨌든 결혼한 커플들은 부디 행복하시길.
그러고 보니 브런치 작가가 되기 위해 작성했던 소개글에 '내 이혼을 막기 위해 브런치를 써보려 한다' 이런 얘기를 썼던 것 같은데 거기에 부합하는 글이 아닐는지.
이 글은 6개월 전에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글인데 어제 그녀를 만나서 결혼의 구질구질함을 들었다. 그 짧은 시간에도 이미 결혼은 환상만으로 사랑만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알게 하는 제도권의 사랑. 그럼에도 사랑으로 극복하라는, 결국에 사랑이 새롭게 발명되는 신비를 맛보리라는 걱정과 기대를 나누었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