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아가기
요즘은 여행을 가도 길을 잃기 어렵다. 여행을 준비하며 '즐길거리, 맛집, 포토스폿'까지 완벽하게 검색을 끝내고 짱짱한 계획표를 손에 넣고 나면 세상 든든해진다. 처음 가보는 길도 리뷰를 지겹게 본 덕분에 아는 동네에 온 듯 친숙하고 걱정이 없다. 맛없는 가게에 들를 걱정도 없고, 바가지 쓸 염려도 없다. 나의 여행은 그렇게 완벽해진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그곳에 남기고 온 흔적은 무엇이었나 되짚어 보았다. 그 풍경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였나. 나의 계획표 덕분에 나는 그곳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도 여행할 수 있었다.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걱정하느라 그곳에 머물지 못했다. 나는 그곳을 어쩌면 유령처럼 떠돌다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한마디 섞지 않을 여행, 나는 그 여행으로 어떻게 달라졌나.
어디 여행뿐인가. 몰라도 아는 척을 해야지. 아니 적어도 모른다고 말하지 않고, 모르는 걸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산다. 그래서 집요하게 알아내고 싶다. 그것은 과연 앎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어떤 궁금증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잊은 채 그저 앎을 쌓아가기 바쁘다. 그렇게 쌓아 올린 앎들은 나의 무엇이 되고 있는지.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한참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던 5년 전만 해도 좋은 곳에 다녀오고 거기가 어딘지 안 알려주는 sns들이 많았다. 알고 싶으면 댓글 달아라, DM 보내라... 그러고는 요청이 너무 많아서 댓글을 다 못 달았다 이런 얘기로 이어지는 모양새가 그때도 지금도 좋지 않다. '나만 아는 정보' 같은 소리 한다 증말. 요즘은 심지어 자기가 만든 자료도 아니고, 교육청 홈페이지 어딘가에 올라온 자료 링크를 알려주면서도 댓글을 달라고 하는데 그건 정말 신종 짜증유발자.
그렇게 '아는 것이 힘'인 시대를 살면서 나는 과연 해상도를 낮출 수 있을까. 해상도를 높여서 선명하게 보고 구체적으로 사는 것도 분명히 의미가 있고 때로는 돈도 된다. 나를 포함해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해상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그러려고 책도 보고 토론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면서 바쁘게 사는 것 아니겠는가. 내 주변의 문제들을 현미경의 눈으로 보고 핀셋의 마음으로 짚어내서 해결해 낼 때의 쾌감은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 현미경을 나에게 쓰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데 더 많이 쓴다. SNS에 올라온 아주 짧은 찰나에서도 무언가를 잡아내고, 흠결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알게 될 때만큼의 그것과 맞먹는 느낌인 것 같다. 이것은 미움과 혐오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최첨단의 삶이 주는 무력감에서 온 것일까.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더 나쁜가,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게 더 나쁜가. 전자는 음흉하다 하고 후자는 재수 없다 하는데 어떤 게 더 욕을 더 먹고 있을까. 대선판에서 대차게 욕을 먹고 재명 청원 40만을 돌파한 젊은 정치인을 보면 그에게 삶의 기쁨은 무엇일지 도무지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모르는 건 죄가 아니라고 했는데 요즘은 그 말이 틀린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것은 노력이 부족한 나의 잘못일까. 그것이 죄라서 그렇게까지 몰아붙이게 되는 것인지 생각한다. 그렇게 알아내서 그 쓰임이 고작 그런 것이라면 그 앎은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그렇게 휘두른 앎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을 어디로 데려다 놓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안다는 모른다를 기본으로 한다.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아는지 모르는지조차 모른다. 그래서 '알았다'면 그전에는 '몰랐다'는 말이다. 그 미묘한 차이가 주는 기쁨은 아이 때 만끽하며 자라났다. 이제는 그 기쁨을 얻기가 쉽지 않은 나이다. 모른다고 말하기가 두려운 나이가 되었지만 적당히 모르고 눈감을 수 있으려면 용기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놓고 모르다가 주저 없이 질문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삶은 좀 더 다정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