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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날에

by 해피가드너


살다 보면 소소한 순간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날이 있다. 그날이 바로 그랬다. 낯선 공간에서 2시간 반 남짓, 처음 만난 사람들이 진심으로 자기의 마음을 꺼내며 울고 웃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역시 글의 힘은 대단하다고 다시 한번 느낀 아름다운 하루였다.




지난주에는 북토크겸 "밤호수의 에세이 클럽(에클)" 뉴욕 모임이 있었다. 올해 초, 에세이를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 에클 9기에 등록했는데 수업이 끝나자,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단톡방에서 함께 책을 읽고, 일상을 공유하며 기수별 출간 작업도 활발하게 이어지는 중이었다. 마침 에클 8기에서 공저 『돌아보니 모두 아름다웠어』를 출간하신 글향의 루쿤도작가님, 미모사작가님, 참꽃마리작가님. 그리고 메릴랜드에 거주하시는 밤호수님이 뉴욕을 방문하였다. 그 덕분에 뉴욕에 사는 우리도 북토크와 함께 글로 이어진 인연을 마음껏 나눌 수 있었다.


모임 장소는 꽃과 커피로 유명한 맨해튼 43가에 위치한 레미카페였다. 아는 동생이 운영하는 곳이라 2층의 공간을 운 좋게 예약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복잡한 맨해튼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잘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딸이 데려다주었을텐데 이번에는 혼자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길을 헤맬 것을 생각해 일찌감치 집을 나서 기차를 탔다.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데 이쯤이야 하면서. 구글 지도를 안내 삼아 걸어가니 무사히 약속 장소가 눈앞에 보였다. 휴.


카페 직원의 안내를 받아 꽃으로 둘러싸인 2층에서 테이블을 셋업하고, 준비해 간 북토크 안내판을 정성껏 꾸몄다. 조금 있으니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수줍은 인사와 반가운 악수, 따뜻한 포옹이 이어졌다.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편안했다. 애초에 8명으로 계획했던 모임은 13명으로 늘어나 조금 비좁았지만, 그래서 더 오붓하고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이 모임의 하이라이트는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미리 밤호수 작가님은 "나를 잘 나타내는 문장"과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떠오른 그의 문장을 생각해 오라고 했다. 나를 잘 나타내는 문장이라니. 그동안 썼던 글을 다시 들춰보며, 어떤 문장 속에서 내가 가장 나다웠을까를 곰곰이 되짚었다. 금세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은근히 어려웠다.


그러다 얼마 전에 쓴 "30살의 나에게 보낸 편지"의 문장 속 일부가 떠올랐다.

'그때에도 너는 감수성이 남달랐어. 마음에 뭔가 늘 아픈 기억을 가득 둔 사람처럼, 맑은 날에도 이유 없이 슬펐고, 웃어도 마음 한구석은 늘 시렸지. 그때의 너를 만나면 안아줄 거야. 이유 없이 울어도 괜찮다고. 그저 마음속에 쌓인 그리움과 외로움이 잠시 흘러나온 것뿐이라고.'


그 시절의 나는 바쁘게 살았지만, 뭔지 모를 외로움이 늘 있었다. 지독히도 논리적인 남편과 살면서 감정의 간극을 느꼈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며 정작 나 자신은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이었을 거다. 감수성이 많았던 지난날의 나와, 그 시절을 편안히 안아줄 수 있는 지금의 나. 그 두 모습을 함께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주저 없이 택했다.


다른 사람의 문장을 들을 때는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누군가는 자신을 "바람"으로 표현했고, 누군가는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몽상가"로, 또 어떤 이는 "꿈꾸는 러너"라 했다. 각자의 언어로 자신을 비춰내는 진솔한 모습들이 참 맑고 다정했다. 서로의 문장을 읽고 나누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이 오갔다. 한국이 아닌 타국에서 글을 쓰는 사람끼리 느꼈던 따뜻한 연대랄까.


그날 밤호수 작가님의 이야기 중 마음에 깊이 박힌 문장이 있었다.

"그리움을 글로 쓰면 마음에 위로가 된다. 글로 쏟아낸 그리움은 아픔도 아름답게 한다.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어제를 그리워하며, 추억이 되어버릴 지금을 그리워한다. 그 안에서 힘을 얻고 다시 내일을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다."(안녕, 나의 한옥집 중에서)


나 역시 그동안 글을 쓰며 그런 감정을 자주 느꼈기에 큰 위로와 울림이 일었다. 아팠던 감정이 조금씩 정돈되고, 그리움이 위로로 바뀌곤 했었다. 글을 쓴다는 건 지나간 시간, 잃어버린 나와 화해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랜드센트럴역까지 함께 걸으면서도 우리는 쉼 없이 글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도 사는 곳도 다 다르지만, 글길을 함께 걷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한 시간이었다. 하루의 끝에서 다시 깨달았다. 행복은 거창한 성취나 대단한 순간이 아닌, 이런 작고 진심 어린 시간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오래 여운이 남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글로 이어진 인연이 마음으로 이어지고, 그 마음이 다시 향기가 되어 퍼져 나간 하루. 그 향기가 오늘을 그리고 내일의 나를 살아가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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