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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방장 Jun 06. 2019

여행의 귀찮음을 견디는 이유

여행을 떠났다.
오기 전까지 수많은 관문을 거쳐 기어코 도착한 곳이다. 한 달 반 전부터 여행지를 정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고, 스케줄을 짜고, 숙소를 고르고, 회사에서 휴가를 받아내기 위한 물밑작업까지. 이 짧은 7일을 위해 틈나는 대로 뇌 한 구석을 가동시키고 몸을 부지런히 해야했다.

여행지에서 미션처럼 내려진 글쓰기에 수요일에 압박을 느끼며, 지금은 골든트라이앵글에서 치앙마이로 돌아가는 차 안이다. 4시간 동안 달리는 창 밖의 풍경이 딱히 남 다르진 않다. 시골 외갓집 다녀오는 국도 느낌이랄까. 내 뒷자리에선 이 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외국인들이 끝말 잇기와 퀴즈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 외엔.

떠나보면 알게 될 거라는 어떤 에세이 제목같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하나. 2014년 겨울, 홀로 긴 여행을 떠났다. 일자리의 계약이 끝나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때의 나는 이 흐트러진 상황들을 정리할 출구가 필요했다. 서른 하나라는 사회적인 나이에 부여되는 안정적인 일과 결혼의 속박에서 벗어나보려 했다. 그 때 영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던 찰나 사귀었던 펜팔 친구가 “그 전에 길게 여행을 가보는 건 어때? 살아보는 건 다르니까.”라고 얘기했다. 중국인이지만 중학교때부터 유학을 하고 있는 그 아이가 괴로워 하던 나에게 해 준 조언이였다. 마침 나에겐 300만원 짜리 여행권이 있었다. 명절 때 홈쇼핑에서 고생한 주부들에게 드리는 경품 이벤트에 당첨된 것이다. 난 그저 디비 누워서 십만원도 안되는 마스크팩을 샀을 뿐인데! 그렇게 혼자 떠난 곳에서 나는 용감무쌍한 나와 마음 먹으면 낯가림이 없는 나, 때로는 계획적이지 않고, 지극히 무던한 나를 알게됐다. 지하철 티켓을 사며 만난 친구와 며칠을 동행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같은 방을 쓰던 독일친구와 같이 미술관에 가고, 번개로 만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어떤이를 기꺼이 내 숙소에 재워 주기도 했다. 몸이 피곤해 하루 일정을 포기할까 하던 차에 짐을 맡기는 캐비넷 앞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에게 나 좀 데리고 다녀달라고 말을 걸어 하루를 같이 보내기도 하고, 야간 버스 해먹에서 만난 친구와 맥도날드도 가고 중국인 펜팔친구를 만나 언덕에 같이 올라가기도 했다. 혼자 외롭지 않으려면, 헤매지 않으려면 마음을 열고 낯선이에게 말을 걸어야만 했다. 그렇게 만난 이들이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 이였기에, 나는 낯선이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좀 더 허물어진 사람이 되었다.

둘. 그렇게 된 나는 3년 뒤 인스타그램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올린 중국 여행 동행 구인에 DM을 보냈다.

셋. 친구와 둘이 떠나는 해외여행은 처음 이였다. 그 곳에서 난 이기적이고, 배려심 없고, 무심한 나를 다시 알게됐다. 미안했지만 그것도 그 곳을 떠나 오니 뒤 늦게 찾아오는 깨달음이였다.

넷. 지금의 여행은 나의 성향과 취향을 조금 더 선명히 알게 해주고 있다. 바삐 돌아다녔던 몇 년 전의 나와는 또 다르게 느긋해졌고, 무조건의 단서들이 없어졌다. 여행지의 특수성도 있겠지만, 30대 절반의 시간동안 경험치가 쌓이며 바뀐 부분이기도 하다.

새로운 곳에 내가 던져지면 일상에 묻혀져 있던 내가 드러난다. 음식의 기준, 시간의 기준, 도덕의 기준, 청결함의 기준까지도. 취향이 선명해 진다. 그리고, 좋고 싫음을 표현하는 나의 방식이 얼마나 못났는 지도.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도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해 간다. 그렇게 제대로 나를 마주하고 돌아오면 일상의 나도 조금은 자라있다. 그래서 그 귀찮은 일들을 견디고, 여행을 떠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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