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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봄/제주영어교육도시 떠나는 사람들

제주영어교육도시의 봄/기대와 현실 사이, 초창기 떠나는 가족들의 이유

by 해피걸

타이틀: 찰나의 봄/제주영어교육도시 떠나는 사람들

부제: 제주영어교육도시의 봄/기대와 현실 사이, 초창기 떠나는 가족들의 이유


제주의 봄은 참 아이러니하다. 따뜻한 햇살을 상상하며 겨울 끝자락을 버텼지만, 막상 봄이 다가오자 차가운 바람과 함께 찾아왔다. 한라산의 눈이 서서히 녹아내리면, 차가운 기운이 바람을 타고 섬 곳곳에 스며들었다. 봄이 온 건지, 겨울이 미련을 남긴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3월이 되면 동백꽃이 저물어 가고, 그 자리를 벚꽃이 채울 준비를 한다. 서귀포 쪽부터 꽃망울이 하나둘 피어나지만, 제주의 바람과 비는 꽃들이 오래 머무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2주 남짓한 짧은 화려함을 뽐내고는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마치 청춘의 한 순간처럼, 눈부시게 피어나더니 손끝에 닿기도 전에 스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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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날씨도 만만치 않았다. 기온은 겨울보다 올랐지만, 바람이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오히려 더 춥게 느껴졌다. 낮에는 포근하다가도 아침저녁으로는 싸늘한 공기가 스며들어 두꺼운 옷을 다시 꺼내야 할 때가 많았다. 서울의 봄을 기대하고 얇은 옷만 준비해 온 여행자들은 한라산의 바람을 맞으며 예상치 못한 추위를 체감하곤 했다.


4월이 되면 ‘고사리 장마’가 찾아온다. 고사리가 자랄 때쯤 내리는 봄비다. 안개와 함께 습도가 높아져 공기마저 촉촉해지는 계절이다. 봄의 상징인 벚꽃과 동백꽃이 지고 나면, 제주도는 진정한 봄빛을 보여주는 듯하다가 곧바로 뜨거운 공기를 머금은 여름날씨로 변한다. 마치 봄을 채 느끼기도 전에 여름이 성큼 다가온 듯했다.


이곳의 봄은 길지 않다.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잠깐 피어나는 벚꽃을 보며, 찰나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자 사람들은 서둘러 카메라를 들이댄다.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순간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더 간절히 바라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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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말했다.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찰나의 봄 같은 순간조차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고. 제주도의 봄을 바라보며 그 말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이곳에 정착했고, 누군가는 이곳을 잠시 머물다 떠났다. 그렇게 사람들도 봄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문득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도로도 제대로 깔리지 않은 흙길을 지나, 황량한 들판 끝에 덩그러니 서 있던 작은 학교 하나. 그리고 이제 갓 준공된 100세대 정도의 3층짜리 아파트. 버스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고, 편의점 하나 없는 그곳에 도착해 함께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3년이라는 시간은 어느 날은 끝없이 길었고, 또 어느 날은 찰나처럼 짧았다. 특히 1년 차가 가장 힘들었다. 편의점 하나 없는 동네에서 우유 한 개 사러 가려면 차로 최소 20분을 달려야 했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콜택시를 부르면 기사님이 "거기가 어디냐"라고 되묻던 그런 곳.


하지만 1년이 지나자, 제주 영어교육도시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버스가 생기고, 사람들이 유입되기 시작했으며, 몇 동 되지 않던 아파트도 하나둘씩 들어섰다. 새로운 국제학교도 문을 열었다. 3년이 되자, 유명 브랜드 아파트까지 들어서면서 제주 국제학교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높아졌고,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이곳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이주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마치 도시가 제 모습을 갖추기까지 최소 3년은 걸린다는 말처럼,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도 조금씩 여유를 찾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도시를 떠나는 이들도 생겨났다. 떠나는 사람들은 그동안 쓰던 물건들을 따뜻한 봄볕 아래 주민들끼리 벼룩시장에 내놓으며, 하나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봄은 따스했지만, 그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며 다른 나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서로 아무것도 몰라 어리바리하며 함께 도왔었다. 낯설고 서툴렀지만, 그 덕에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나 삶이 안정되자, 마치 여느 도시처럼 사람들 사이의 정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우리 가족도 그들과 함께 새로운 나라로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딸이 다니던 학교도 다른 나라에 새로운 캠퍼스를 열 계획이었기에 함께 옮기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였다. 원래 우리는 3년만 있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겨우 일곱 살이 된 딸이 학교를 너무 좋아했고, 나 역시 한국 사람으로서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다. '조금만 더 있어보자'라는 결정을 내린 이유였다.

결국, 친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 남았다.


유독 아름다운 제주의 3월. 눈부신 햇살과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 아래, 나만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함께 이곳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기에 바빴고, 나는 그 뒷모습들을 보며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머물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흔들린다. 찰나의 봄을 붙잡으려 손을 뻗어 보지만, 결국 손끝을 스치고 사라지는 순간들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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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영어교육도시, 떠나는 가족들

제주 영어교육도시로 내려오는 이유는 대부분 비슷하다. 더 나은 교육 환경, 아이의 미래, 새로운 기회.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시작하지만,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짐을 싸서 돌아가는 가족들도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몇 가지 공통된 모습이 보인다.


첫 번째는 '외로움에 지친 가족'이다.
지인의 지인은 딱 6개월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아빠가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더는 못 버티겠다고 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엄마들과 어울리며 정보를 공유하고, 골프나 모임을 즐기는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한 그녀는 점점 더 고립됐다. 결국, 외로움이 이겨버렸다.


두 번째는 '사춘기 아이와의 갈등'이다.
고학년 자녀를 둔 가정에서 흔히 겪는 일이다. 아이들은 점점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사춘기의 벽은 높아진다. 아빠는 멀리서 전화로 훈계해 보지만, 아이들은 "아빠도 없으면서 왜 이래?"라는 말 한마디로 끝내버린다. 엄마 혼자서 아이를 붙들고 싸워야 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고단하다.


세 번째는 '뚜렷한 목표 없는 이주'다.
막연히 "좋은 교육 환경이니까"라는 기대만으로 내려온 가정일수록 흔들림이 더 크다. 아이는 영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며 두 배의 학습 부담을 안는다. 엄마는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하고, 아빠는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마음도 멀어져 간다. 이 모든 혼란을 견디게 해 줄 확고한 교육 목표가 없다면, 남아 있는 이유를 찾기 힘들어진다.


이 외에도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제주를 떠난 가족들이 있었다. 한 가정은 안타깝게도 LPG 가스 사고를 겪었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참고로 제주영어교육도시에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후 지어진 대부분의 아파트는 확장형 구조로 설계되었고, 관리사무소에서는 "LPG는 바닥에 가라앉으니 항상 주의해야 한다"는 당부를 자주 하곤 했다. 평생 도시가스를 써왔던 입장에선 이런 이야기가 꽤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또 다른 가정은 서울에서 내려온 은퇴한 60대 부부였다. 제주도의 아름다움에 반해 새로운 삶을 꿈꾸며 정착했지만, 습기가 많은 제주의 기후가 관절에 무리를 줘 결국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떠나는 순간까지도 “제주가 너무 좋았는데, 몸이 버텨주질 않네요”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물론 이후에 지어진 새로운 아파트들은 이런 습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지반을 높여 설계된 덕분에, 초창기에 지어진 아파트들보다 습기가 덜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도 1층은 다른 층에 비해 습기가 더 많다는 점만큼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반면, 끝까지 버티는 가족들은 대부분 '확고한 교육 방침과 목표'가 있다.
외로움과 싸우면서도 “우리는 이걸 위해 왔다”라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에 견딜 힘을 만든다. 하지만 이런 확신을 가진 가정도 결코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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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주 영어교육도시에 남느냐 떠나느냐를 가르는 건,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준비일지도 모른다. 교육도 중요하지만, 외로움과 고립, 가족 간의 거리까지 견딜 수 있는 의지와 목표가 없다면 이곳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다.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안타깝지만, 그 선택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곧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봄바람에 흩날리면 길가엔 꽃길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는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기대를 품고 떠날 채비로 바쁘다. 파란 하늘 아래 분홍빛 꽃비가 내려도,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볼 여유조차 사치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제주 영어교육도시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터져 나왔던 감탄은 이제 일상의 풍경 속에 스며들어 당연함이 되어버린다. 설렘으로 가득했던 이곳도, 어느새 익숙함과 이별의 공간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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