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보다 깊게, 일상보다 단단하게
타이틀:양파보다 깊게, 일상보다 단단하게
부제:손가락 두 개가 멈춘 날, 비로소 보인 것들
(작은 사고가 건넨 감사와 적응의 이야기)
글을 읽기 전에 안내 말씀드립니다.
5일 전, 양파를 썰다가 그만 손가락 두 개를 베이고 말았습니다. 그중 하나는 근육까지 다친 것 같아, 통증이 계속되고 피도 잘 멈추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금방 나아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깊게 베인 탓인지 상태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더군요.
그러다 보니, 오늘 발행할 브런치 글을 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오늘로 5일째가 되어 피도 굳고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물론 아직 키보드를 치거나, 손가락에 물이 닿으면 안 되긴 하지만요.
그래도 브런치 글을 쓰고자 마음을 먹었지만, 이번엔 시간이 부족하더군요^^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안 써야지’ 하고 포기하려다, 혹시라도 제 글을 기다리는 구독자분들이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문득 ‘아하! 예전에 손가락 다친 이야기를 올렸던 블로그 글을 가져오면 되겠구나’ 하고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글을 바탕으로,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조금 더 보태어(독수리타법) 오늘의 글을 완성했습니다.
양해해 주시고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타이틀: 양파 대신 손가락 두 개를 베었다 / 약사 라이자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 독수리 타법 / 손가락 10개 쓸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일이군
딸의 A레벨 시험이 시작되기 이틀 전, 손가락 두 개를 크게 베였다.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나. 그나마 다행인 건 왼손이라는 것.
양파를 썰다가, 그만 양파 대신 손가락을 썰어버렸다.
급히 키친타월로 감았지만 피가 멈추지 않았다.
피가 계속 나서 밴드를 붙일 수조차 없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옆집에 사는 티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티나는 마데카솔 분말과 일회용 밴드로 나의 손을 감아주었다.
“어떡하지? 병원 응급실 가야 하나?”
하필이면 이번에 새롭게 구매한, 아주 잘 드는 칼에 베어버렸다.
티나도 나도 일단은 약사 라이자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약국에 도착해 손가락을 보여주니,
라이자는 가볍게 “왜 양파 대신 손가락을 썰었어요?” 하고 웃으며
내 손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응급처치 잘하셨어요.” 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물이나 소독약으로 닦지 못하고 그냥 밴드로 감아버렸는데,
지금이라도 풀어서 소독하고 다시 감아야 할까요?”
내 질문에 라이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풀지 마세요. 그래서 다시 피가 나게 하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응급처치는 잘했어요. 그대로 2~3일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러면서 “이건 주로 간호사들이 쓰는 거예요.”라며
adhesive surgical dressing을 건넸다.
그리고 손가락 통증은 paracetamol로 해결하라면서 가장 싼 약을 주셨다.
라이자는 약국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마치 자신의 가족처럼 대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곳에서 한자리에서 족히 30년 이상 약국을 하고 계신다.
티나와 약사 라이자 같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오늘, 왜 이런 사달이 일어난 걸까?
조급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메뉴를 시도했던 것도 한몫했다.
딸의 친구들과 딸, 그리고 나를 위한
주중 연례행사인 월요일 저녁 한 끼를 해보겠다고 정신없었다.
그러다 결국 사고를 내버렸다.
그 순간 귓가에 울린 딸과 남편의 말.
“한 번에 하나씩 하라고 했는데…”
약국에서 돌아온 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라, 그럼 브런치 글은 어떻게 쓰지?’
이 와중에 웬 브런치 글쓰기 걱정이라니…
이틀 후면 딸은 약 한 달여간 과목별로 분포되어 있는 A레벨 시험을 치르게 된다.
결전의 날들이다. 그래서인지 딸은 평소보다 더 예민해졌다.
그런데, 왜 딸이 수험생인데 내가 떨고 있었던 걸까.
이제야 알겠다. 왜 친구들이 늘 말했는지,
“고3 엄마 돼봐야 안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
나는 그런 딸에게 최대한 신경을 덜 쓰려 애쓰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브런치 글에 집중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른다.
다른 데 신경을 쓰면, 딸에게 신경을 덜 쓰게 될까 봐.
물론 그래서 연재일이 없는 블로그 글은 뒤로 밀린다.^^
이제 곧 연재일이 종영되는 브런치북이 하나 있는데,
이 글은 독자들과 약속한 날에 무조건 발행을 해야 하는,
돈도 안 되는 그런 일이다.
스스로 책임을 지우는, 뭐 그런 부채의식 같은 것 중 하나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에게 억지로라도 글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남편은 이런 나를 두고 종종 놀린다.
“꾸물거리는 사람.”
“마감기한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결국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 글을 쓰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독수리 타법으로 손가락 두 개를 제외하고 타자를 치려니 정말 느렸다.
그래도 이참에 깨달았다.
손가락 열 개를 다 쓸 수 있는 것,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타이틀:양파보다 깊게 베인 일상
부제:손가락 부상에서 깨달은 사소한 행복과 적응의 힘
손가락을 다친 후 4일째다.
라이자의 말대로 처음에 감았던 밴드를 떼고, 라이자가 준 새 밴드로 갈아 끼우려 했는데, 손가락 한 개는 여전히 피가 제대로 굳지 않았고 부위도 약간 부어 있었다. 감염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병원에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일단 약사 라이자에게 보여주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약사 라이자를 찾아갔다.
라이자는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천천히 나아지고 있다며 지금처럼 관리하면 굳이 병원에 갈 필요는 없다고 하여 나를 안심시켰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왼손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비닐장갑과 테이프로 단단히 감싸고, 마침내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을 수 있었다. 참 행복한 순간이었다.
매일매일 아무렇지 않게 했던 씻는 일이 막히니, 얼마나 기분이 찝찝했던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가끔씩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또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왼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도 점점 덜 불편하게 느껴지고 있다.
양파 대신 썰게 된 손가락 두 개로 인해,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과 일상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동안 블로그에 포스팅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은 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 손가락 다친 이야기를 올린 포스팅에는 처음으로 협찬 제안이 들어왔다.
포스팅 알바는 많았지만, 협찬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지금의 처지에서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어 안타깝지만, 미래에는 받아들일 수 있는 형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되면 브런치 글에 공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