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부활절 모임과 영화 「최후의 만찬」이 내게 남긴 것
제목: 나는 그날, 버티는 방식을 다시 배웠다.
부제: 소박한 부활절 모임과 영화 「최후의 만찬 」이 내게 남긴 것
소박한
수요일, 우리는 늘 하던 성경공부 대신 부활절과 관련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이제 곧 부활절이기도 해서, 평소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 벤이 아이디어를 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빔프로젝터를 가져와 함께 영화를 보자는 것이었다. 가족들과도 종종 그렇게 영화를 본다고 했다.
문득 25년 전이 떠올랐다. 그 시절 영국에서는 빔프로젝터로 영화를 보는 것이 유행이었고, 우리 집에서도 소니 제품을 구입해 한동안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들었다. 93세이신 케이틀린의 집에는 하얀 벽이 거의 없는데, 과연 가능할까?
벤은 하얀 천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며 직접 준비하겠다고 했다. 스텔라는 팝콘을 준비했고, Sam은 아이스크림을 가져왔다. 나는 생일을 맞은 프란시스를 위해 생일카드와 초코파이를 챙겼다. 케이틀린은 늘 그렇듯 비스킷과 커피를 준비해 우리를 맞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준비한 작은 것들이 모여, 하나의 ‘부활절 이벤트’가 만들어졌다.
벤의 추천으로 우리는 2025년작, Chris Tomlin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성경 영화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을 보게 되었다. 약 두 시간 가까운 러닝타임. 요즘처럼 짧은 영상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솔직히 쉽지 않은 길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꽤 몰입감이 있었다.
특히 유다와 베드로의 심리를 따라가며, 배신과 선택의 순간을 긴장감 있게 그려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기존의 많은 영화들이 십자가 장면을 중심으로 길게 다루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그 이전, 마지막 밤의 감정과 갈등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전 정보도, 기대도 없었기 때문일까. 오히려 더 신선하게, 깊이 몰입하며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이 질문을 끝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축제 분위기의 크리스마스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올 수 있지만, 기독교인에게는 부활절이 더 본질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봄이 거의 코앞까지 왔다. 영국은 3월 31일부터 서머타임이 시작되었고, 낮이 길어지고 있다. 기온도 점점 올라가고, 길가에는 노란 수선화와 벚꽃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계절은 분명 변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몸과 마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작년, 나는 감염으로 인해 6주 동안 다섯 번이나 응급실을 오갔고, 그 과정에서 평생 처음으로 공황발작을 경험했다. 이후로는 다시 발생하지 않았지만,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시어머님께서 뇌출혈로 쓰러지신 이후, 편마비와 감염으로 인한 응급 상황이 두 차례나 반복되었고, 그 긴장된 시간은 벌써 8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하루하루 해결해야 할 일들에 쫓기다 보니, 나는 점점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스스로를 동굴 속에 가둬버렸다. 밖으로 나가는 일은 최소한으로 줄였고, 그저 버티는 데 집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전문 사회복지사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숨으면 안 된다”라고 말해왔던 사람이, 정작 나는 같은 방식으로 버티고 있었다.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런 나를 밖으로 끌어낸 사람이 Sam이었다. 성경공부 모임을 핑계로, 또 다른 이유들을 만들어가며 계속 나를 만나게 했다. 덕분에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게 되었고, 그 시간이 조금씩 나를 살리고 있다. 동굴 속에만 있던 나 때문에 친구들이 걱정을 했다. 나는 괜찮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아마도 나는 여전히 강한 척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의 약함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쉽게 보여주지 못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하지 않다는 것을.
그날 모임이 끝날 무렵, Sam은 나와 내 딸을 위해 작은 이스터 초콜릿과 카드를 건넸다. 아주 사소한 선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오래 남았다. 거창한 위로가 아니라,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작은 것을 나누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힘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멀리서 나를 걱정해 주는 고등학교 친구들의 염려, 그리고 Sam의 세심한 보살핌과는 별개로 나 스스로를 북돋우는 개조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영화 속에는 긴장감이 흐르는 ‘최후의 만찬’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또 하나의 식탁이 있었다. 유월절을 기념하는 한 가족의 저녁 만찬이었다.
대가족이 모인 그 집안에는 위층과는 전혀 다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모두가 알고 있었고, 왜 이 음식을 먹는지, 왜 전통을 지키는지에 대해 할아버지가 손자녀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장면에서는 유쾌함과 사랑이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세 세대가 빙 둘러앉아 전통을 나누고, 함께 웃고 즐기는 모습.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아, 저거구나.’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는 내 삶의 긴장감과 절망이 아니라, 그 아래층의 만찬처럼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을 기다리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어제부터 악뮤의 「소문의 낙원」을 반복해서 듣고 있다. 이 노래에는 특유의 ‘쉼’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선율 안에 머물며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묘한 마력이 있다. 나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일을 할 때 특정 음악을 반복해 듣는 습관이 있는데, 이는 심리적 안정과 효율을 동시에 잡는 나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어제부터 곁에 둔 이 곡 역시 지친 나를 위로하고 편안한 휴식을 선사하는 참으로 매력적인 음악이다.
사실 작년 8월, 뇌출혈로 쓰러지신 시어머님을 신경 쓰며 내 건강 문제까지 겹친 지난 8개월은 스스로를 “강해져야 한다”라고 끊임없이 다그쳐온 시간이었다. 그런 나에게 이 음악은 이제 잠시 마음을 내려놓아도 좋다고 나직이 건네는 위로와 같다.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니 문득 포기하고 싶거나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 알고 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 또한 나의 현실임을 말이다.
버텨야 한다.
그러니까, 유쾌하게 버텨보자.
어차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결국, 버티는 수밖에.